국제 경제·마켓

'대사직 시대' 일 년…몸값 높아진 '낀 세대'[정혜진의 Whynot 실리콘밸리]

팬데믹 이후 Z세대 '안티워크' 늘고

자산 가치 늘어난 장년층은 '줄은퇴'

수요서 공급 우위로 일자리시장 변화

밀레니얼·중간연차 찾는 회사들 급증

미국의 한 업체가 구인 광고를 하기 위해 버스 전체를 구인 광고로 꾸몄다. 연합뉴스미국의 한 업체가 구인 광고를 하기 위해 버스 전체를 구인 광고로 꾸몄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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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실리콘밸리의 한 테크 기업 인사 담당자가 “곧 팀 리더가 될 중간 인력들의 퇴사가 이전에 비해 크게 늘었다”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퇴사자들의 링크드인 프로필을 조회하는 것 정도”라고 답답한 상황을 토로했다. 전년 성과에 따른 보너스 등 보상 패키지가 결정되는 1~2월은 많은 이탈자가 발생할 수 있어 긴장하는 시기지만 올해는 유독 더하다는 설명이다.

지난해 4월 이후 매달 평균 400만 명의 미국인들이 직장을 떠났다. 이런 대규모 이탈에 놀란 업계와 정부도 저마다 해석에 나섰다. 앤서니 클로츠 텍사스 A&M대 교수가 언급한 ‘대사직(Great Resignation) 시대’라는 신조어가 이런 현상을 표현하는 데 가장 폭넓게 쓰였다. 당시 눈에 띄는 현상으로 주목을 받은 것은 커뮤니티 기반 소셜 플랫폼 레딧에 등장한 ‘안티 워크(anti work) 운동’이었다. Z세대(1996~2012년 출생자)의 근로 거부 풍조와 더불어 코로나19 팬데믹(세계적 대유행) 이후 자산 가치가 늘어난 장년층과 60대 이상이 은퇴를 선택했다는 분석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이런 논의에서 한창 일할 나이이자 회사의 허리 역할을 하는 밀레니얼(1981~1995년 출생자)의 행보는 배제돼 있었다.



대사직 시대가 일 년 가까이 이어지는 동안 밀레니얼은 누구보다 활발하게 링크드인 프로필을 교체하고 있다. 사회 초년생과 책임자급 사이에 있는 중간급 인력(mid-level), 소위 ‘낀 세대’가 대사직 시대에 가장 큰 족적을 남겼다는 분석이다. 지난해 하버드비즈니스리뷰가 근로자 900만 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분석에 따르면 퇴사율이 가장 높았던 연령대는 30~45세였다. 이들의 평균 퇴사율은 전년 대비 20%포인트 이상 늘었다. 25~30세, 45~60세 근로자의 퇴사율은 소폭 느는 데 그쳤고 20~25세, 60~70세의 퇴사율은 오히려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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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밀레니얼은 퇴사 후 어떤 일자리로 갔을까. 인력 수요가 늘어난 많은 회사가 5년 차 이하의 사회 초년생보다 중간 연차에 대해 높은 선호도를 보였다. 새로 채용한 직원들도 특별한 적응 기간 없이 바로 원격근무에 투입돼야 했기 때문이다. 또 미국 전역에 지난해에만 640만 개의 일자리가 만들어지면서 한두 단계 높은 포지션으로 옮겨갈 기회가 늘어난 것도 기회로 작용했다.

/연합뉴스/연합뉴스


지난해 기존 회사에서 매니저 일을 그만두고 집 근처 회사에 책임자급 일자리를 구한 13년 차 직장인 사나는 미국 경제 매체 인사이더와의 인터뷰에서 대사직 시대를 두고 “경력의 대부분을 구매자 위주의 시장(buyer’s market)에 있다가 팬데믹과 인력난이 겹쳐지면서 판매자 위주의 시장(seller’s market)으로 옮겨간 시기였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 책임과 그에 맞는 권한을 부여받으면서 ‘커리어 사다리’를 오를 수 있게 됐다”고 만족감을 표시했다.

라이언 로슬란스키 링크드인 최고경영자(CEO)는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전 세계 8억 명에 달하는 링크드인 가입자 중 프로필상 소속을 바꾼 이들의 수가 전년 대비 54% 늘었다”며 “많은 이들이 문화와 가치에 따라 직장을 옮기는 ‘대개편(Great Reshuffle)’에 가깝다”고 강조했다. 지난달 미국 라디오 매체 NPR은 “예외적인 사례를 제외하면 많은 직장인이 더 높은 연봉과 좋은 처우, 유연성을 위해 직장을 그만둔다”며 ‘대협상(Great Renegotiation) 시대’라는 용어를 제시했다. 카린 킴브로 링크드인 수석 경제학자는 “1년 전에 비해 링크드인의 일자리가 두 배가 됐다”며 “근로자들이 더 좋은 포지션으로 협상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됐다”고 강조했다.

하이렉트는 구직자가 관련 분야를 찾으면 공고를 낸 최고경영자(CEO) 등과 직접 채팅을 주고받을 수 있게 설계돼 있다. /하이렉트 앱 화면 캡처하이렉트는 구직자가 관련 분야를 찾으면 공고를 낸 최고경영자(CEO) 등과 직접 채팅을 주고받을 수 있게 설계돼 있다. /하이렉트 앱 화면 캡처


노동시장이 공급자 우위 시장으로 바뀌자 구직 서비스들도 공급자 친화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스타트업 전문 채용 애플리케이션인 하이렉트는 ‘몇 주가 아니라 몇 시간 만에 일자리를 찾는다’는 슬로건을 내세웠다. 구직자들이 공고를 낸 회사 대표와도 직접 채팅을 주고받으며 채용 단계를 크게 간소화했다. 구직자는 이 과정에서 비용을 낼 필요가 없게 해 출범 3년 만에 빠른 속도로 가입자 수를 늘리자 자연히 유망한 스타트업들이 고객이 됐다. 채용 서비스 업체 인디드의 워크 프롬 애니웨어 앱은 원격근무 일자리만을 서비스 대상으로 삼아 원격근무라는 조건을 최우선시하는 이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대사직의 원인을 찾느라 분주할 때 스타트업들은 바뀐 흐름에 맞춰 새로운 사업 기회를 만들어낸다. 이런 곳이 실리콘밸리다.


실리콘밸리=정혜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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