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연합(EU)이 14일(현지 시간) 열린 EU-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 정상회담에서 동남아 내 에너지 인프라 발전 등에 대한 100억 유로(약 13조 8000억 원) 규모의 투자 계획을 발표했다. EU는 경제 협력을 강화하며 중국·러시아에 대한 공동 견제 수위를 높이려 애쓰고 있지만, 정작 아세안의 반응은 심드렁하다.
EU는 이날 발표한 공동성명에서 “아세안 투자 가속화를 위해 ‘글로벌 게이트웨이’의 일환으로 100억 유로를 동원한다”며 “투자금은 에너지·교통·디지털·교역 증진 및 지속 가능한 '가치 사슬' 구축에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글로벌 게이트웨이’는 지난해 EU가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에 맞서 마련한 역외 투자 프로젝트로, 2027년까지 전 세계 인프라 건설 및 디지털·기후 사업 등에 최대 3000억 유로를 투입하는 것이 골자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유럽 대륙에 닥친 전쟁이 유럽만의 문제가 아님은 분명하다”며 “식량과 에너지 안보 등 글로벌 과제가 첨예할수록 우리의 파트너십이 더욱 공고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 전쟁발(發) 에너지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를 위해 동남아 국가들과 협력을 강화하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성명에는 중국과 러시아를 겨냥한 경고 메시지도 담겼다. 성명은 "2002년 체결된 '남중국해 분쟁 당사국 행동선언'(DOC)의 완전한 이행의 중요성"을 강조해 중국을 우회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회원국 대부분이 우크라이나 전쟁을 강력히 규탄한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다만 정작 아세안 측은 이번 회담 성과에 불만을 드러내고 있다. EU와 10여년 전부터 논의해온 양측 블록 간 자유무역협정(FTA) 관련 성과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EU는 아세안 회원국인 미얀마 군사 정권의 친러 기조를 이유로 FTA 협상 재개을 주저한 것으로 알려졌다. 성명문은 FTA가 “공동의 장기적 목표임을 재확인했다”고 언급하는 데 그쳤다. 훈 센 캄보디아 총리는 “아세안은 항상 EU의 도움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는다. 두 지역 경제의 상호보완성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며 “정치가 양측 관계의 발전을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지적했다.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필리핀 대통령은 아세안이 지정학적 십자포화에 휘말리는 것이 달갑지 않다며 “어느 초강대국과 협력할지 선택을 강요받는 냉전 상황으로 돌아가는 것을 절대 거부한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