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필두로 인도와 중동 국가들이 경제위기에 처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구제금융을 늘리면서 세계 금융 질서가 파편화되고 있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들 국가는 위기국을 상대로 높은 금리를 적용하고 있어 구제금융 제공자로서의 역할에 소홀하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중국의 경우 구제금융을 위안화의 글로벌 위상을 제고하기 위한 지렛대로 활용하는 분위기다.
8일(현지 시간) 제바스티안 호른 세계은행 이코노미스트는 “중국뿐 아니라 아랍 국가들과 인도가 채권국으로서 힘을 키우고 있다”며 “이에 따라 국제 금융 구조가 점점 다극화되고 불투명하며 파편화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해당 연구에는 호른 이코노미스트 외에 카먼 라인하트 하버드대 교수 등 석학이 참여했다.
호른 이코노미스트는 중국을 ‘마지막 대부자(last resort)’라고 표현했다. 이는 시장에서 자금 조달에 실패한 시중은행들에 중앙은행이 마지막 단계에서 대출을 제공하는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사실상 중국이 신흥국들의 중앙은행 역할을 한다는 의미다. 그는 “중국이 내준 대출은 15년 전만 해도 전무했지만 지난해에는 연간 대출액이 400억 달러에 다다랐다”며 “15년간 누적 금액은 2400억 달러 규모로, 국제통화기금(IMF)이 같은 기간에 제공한 구제금융의 20%에 육박한다”고 설명했다.
중국이 자금을 제공하는 주요 경로는 통화 스와프 라인이다. 중국 인민은행은 지난 20년간 총 40개국과 상호 통화 스와프 라인을 개통했으며 2021년 기준 아르헨티나와 이집트·튀르키예·스리랑카·수단·파키스탄 등 17개국이 이를 이용해 위안화 대출을 받았다. 주로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국가들이다. 이날 아르헨티나는 위안화 사용을 확대하는 조건으로 중국과 체결했던 스와프를 연장하는 데 합의했다. 합의 금액은 외화보유액 확대를 위한 1300억 위안, 외환시장 운영을 위한 350억 위안 등 총 1650억 위안 규모다.
호른 이코노미스트는 “중국과의 통화 스와프는 공식적으로는 위안화를 이용한 무역 결제를 활성화하기 위한 것이지만 연구 결과 경제적으로 어려워진 국가들이 단기 유동성을 확보하거나 재정 곳간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이용하는 경향이 늘고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호른 이코노미스트는 “스와프 라인과 중국 국영기업을 통해 해외에 제공된 대출금리는 5% 이상”이라며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스와프 라인이 0.5%에 못 미치고 IMF 구제금융이 2~3%대, 미국 국채론도 5% 이하라는 점을 고려하면 상대적으로 비싼 수준”이라고 지적했다.
이처럼 중국이 위안화의 해외 대출을 늘리고 중장기적으로 국채시장도 개방하고 나서면서 중국 금융의 국제적인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크리스토퍼 클레이턴 예일대 교수는 “중국은 2002년 해외 중앙은행 등 적격외국인기관투자가(QFII)를 시작으로 지난해까지 시장을 점진적·선택적으로 확대하는 전략적인 움직임을 보였다”며 “그 결과 중국 국채에 대한 선진국 투자자들의 포지션은 2018년을 기점으로 긍정적으로 변했다”고 말했다.
물론 이 같은 위안화의 위상 제고가 미국 국채의 지위까지 흔들 정도는 아니다. 케네스 로고프 하버드대 교수는 화상 메시지를 통해 “통상 채권 발행량이 적을수록 안전하고 늘어날수록 투자에 부적격해지는데 미 국채의 경우 이런 개념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단언했다. 예외적인 수준의 위상 덕에 미국은 경제 상황과 관계없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미국은 침체기에도 채권 발행량을 늘릴 수 있고 이는 가치가 있다”고 강조했다.
반면 한때 안전자산이던 영국 채권의 위상은 예전 같지 않다. 리샤브 커팰러니 위스콘신대 교수는 “국내총생산(GDP) 대비 부채비율에 따른 수요 등을 분석해보면 영국 국채의 시장 영향력 그래프는 정확히 미국과 반대로 가고 있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