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이며 옷이며 보험회사 노트북은 어쩌냐. 거기에 들어 있는 정보는 또 다 어떡해. 회사에서도 일이 손에 안 잡혀서 왔어. 언니 나 어떡해.(구룡마을 주민 A 씨)”
“터질 게 터졌습니다. 시설 노후화로 전선 피복이 다 벗겨져 있었거든요. 여름에는 수해, 겨울에는 대형 화재. 시한폭탄 같은 곳이지만 떠날 수 없습니다. 1988년도부터 살았던 터전이니까요. 여기를 떠나면 일자리도, 살 곳도 없어요. 대책이 필요하지만 쉽지 않습니다.(구룡마을 주민 김재완 씨)”
설 연휴를 하루 앞둔 20일 서울 강남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불리는 구룡마을에서 큰 화재가 발생해 주민 500여 명이 긴급 대피했다. 지난해 8월 기록적인 폭우로 수해를 입은 지 5개월 만에 또 큰 불이 발생하면서 판자촌 주민들은 간신히 복구해놓은 삶의 터전을 또 한 번 잃게 됐다.
이날 오전 10시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의용소방대 건물 내부에는 내복과 슬리퍼 차림으로 겉옷만 간신히 챙겨 나온 주민 10여 명이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날 화재 최초 신고자인 신 모(72) 씨는 “새벽 6시 20분쯤 부엌을 나갔다가 형광등이 찌릿하면서 깜박거리고 김치냉장고에서 지직 소리가 나는 걸 느꼈다”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43-67호에서 불이 나무처럼 솟구치는 걸 발견해 슬리퍼 차림으로 뛰쳐나와 ‘불이야’ 외치며 온 동네 사람들을 깨웠다”고 밝혔다.
구룡마을 4지구에서 40년 동안 거주한 조해천(70) 씨는 “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나와보니 불이 났다고 해 아무것도 못 챙기고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며 “폭우 피해가 복구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또 집이 다 타버렸으니 설날에는 이재민을 위해 마련된 호텔에서 아들·며느리와 함께 지내야 할 것 같다”고 한숨을 지었다.
비닐과 합판·스티로폼 등으로 지어진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환경이 불씨를 키웠다. 구룡마을 3구역에 30년 넘게 산 오창환(67) 씨는 “주민들이 보온 때문에 건물 안팎으로 비닐을 겹겹이 덧대 놓은 탓에 물을 뿌려도 불길에 닿지 않아 화재 진압이 오래 걸렸을 것”이라며 “우리 집이 피해를 면했어도 20~30년씩 알고 지내던 사람들 집이 다 타버렸으니 마음이 불편하고 마을 분위기도 뒤숭숭하다”고 말했다.
소방 당국에 따르면 이날 화재로 가건물 형태의 주택 약 60채가 불에 타고 44가구에서 이재민 62명이 발생했다. 다행히 인명 피해는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 화재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불은 이날 오전 6시 27분께 구룡마을 4지구에서 발생해 주변으로 확대됐다. 오전 7시 1분께는 5지구 입구까지 불이 번지고 있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소방 당국과 강남구청은 주민 약 500명을 대피시키고 불길이 인근 구룡산 등지로 더 번지지 않도록 방어선을 구축한 채 진화 작업을 벌였다. 소방·경찰 인력 500여 명과 장비 61대, 육군 장병 약 100명, 강남구청 소속 인력 300명이 동원됐다. 소방 당국은 오전 10시 10분께 큰 불길을 잡은 뒤 대응 단계를 해제하고 11시 46분쯤 불을 완전히 껐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화재 발생 보고를 받은 후 오전 7시20분께 유창수 행정2부시장 직무대리, 최진석 안전총괄실장 등 간부들과 함께 현장을 찾았다. 현장에서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와 강남구에 이재민 주거 이전 대책을 조속히 마련해 달라고 요청했다. 스위스를 방문 중인 윤석열 대통령은 “행정안전부 장관을 중심으로 소방 당국에서 가용 인력과 장비를 총동원하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