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레타는 포기가 없는 사람이죠. 남성 기득권 사회에서 ‘끈기’ 하나로 가정을 지키고 기자의 사명감도 지켜나갔어요”
‘보스턴 교살자’를 최초 보도한 여기자 로레타 맥러플린을 연기한 키이라 나이틀리는 시종일관 경직된 표정을 풀지 않는다. 유일하게 세 건의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연결고리를 찾은 로레타는 “살인들에 연관성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지만 상부에서는 기사꺼리가 되지 않는다며 후속기사를 차단한다. “여자가 얼마나 죽어야 기사가 되는데요?”라며 맞서도 소용없었다. 그 사이 네 번째 살인이 일어나고 점점 미궁 속에 빠져드는 거대한 사건 앞에서 줄담배를 피우며 타자기를 두드리는 로레타의 모습은 숙연하기까지 하다.
지난 6일 글로벌 버추얼 기자회견에서 키이라 나이틀리는 “2명의 여기자 관점에서 연쇄살인마 이야기를 한다는 게 흥미로웠다. 사회적 서열이 지배하는 남성 중심의 직장에서 커리어를 쌓으며 필사적으로 가정을 지키려는 여성의 활약상이 일종의 카타르시스로 와닿았다”고 출연 의도를 밝혔다.
영화는 1963년 성폭행을 하고 스카프나 스타킹으로 목을 졸라 살해한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시작된다. 보스턴 여성들을 최악의 공포에 떨게 했던 사건이었지만 경찰은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채 이를 무마하기 급급했다. 상부의 무시와 경찰수사관의 조롱에 맞선 로레타의 보도가 아니었다면 묻혀버렸을 사건이었다. ‘레코드 아메리칸’의 기자였던 로레타는 1960년대초 보스턴에서 혼자 사는 여성을 노려 13명을 살해한 연쇄살인마에게 ‘보스턴 교살자’라는 이름을 붙인다. 피해자들은 모두가 끔찍한 모습으로 살해되었고 목에는 예외없이 스카프나 스타킹이 감겨져 있었다. 심지어 침대에서 살해된 한 여성 옆에는 ‘해피 뉴이어’라고 적힌 카드까지 놓여 있었다. 이후 목숨을 건 로레타의 취재와 보도가 시작되고 1년이 지난 1964년 앨버트 드살보가 연쇄 강간혐의로 체포된다. 심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이 ‘보스턴 교살자’라고 자백해 파문을 던지지만 증거 불충분으로 기소되지는 못했다. 그리고 종신형에 처했던 드살보가 복역 중 동료 죄수의 칼에 찔려 사망하면서 이 사건은 영구 미제로 남았다.
오는 17일부터 디즈니플러스가 방영하는 이 영화의 각본과 연출을 맡은 맷 러스킨 감독은 “진 콜의 부음을 읽다가 그녀의 유가족으로 두 딸이 있음을 알게 됐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이어 그는 “그 중 한 명의 페이스북에서 사진 한 장을 보았는데 사진 속에서 나의 오랜 친구를 껴안고 있었다.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아는 분이냐’고 물었더니 그 여성은 어머니이고 진 콜은 자신에게 절대적 존경의 대상인 할머니라고 했다. 그 때부터 미처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고 밝혔다.
영화가 어둡고 무겁지만 캐리 쿤(진 콜 역)과 키이라 나이틀리(로레타 맥러플린 역)의 앙상블 연기가 볼만히다. 로레타가 위협에 굴하지 않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보스턴 교살자를 추적한다면 조력자인 진 콜은 성차별이 만연한 보스턴이란 도시에서 가장 악명 높은 연쇄 살인범의 존재를 여성들에게 끊임없이 알린다. 키이라 나이틀리는 “탐사보도 여기자들에게 헌사하는 ‘러브송’ 같은 영화”라며 “권력의 위치에 있다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실제로 로레타는 ‘보스턴의 여성들을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 대중에게 공개돼야 하는 정보’라고 설득하지만 그 시점에서 불평등성으로 묵살당했다. 우리 사회의 안전망 구축을 위해서는 더 많은 여성 저널리스트들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하은선 미주한국일보 편집위원, HFPA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