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프란시스코의 미션 지역에 자리한 챗GPT 개발사 오픈AI. 오픈AI를 중심으로 생성형 인공지능(AI) 붐이 들불처럼 일어나면서 이 지역 일대는 ‘대뇌 밸리(Cerebral Valley)’라는 애칭을 얻게 됐다. 저마다 사업 모델에 생성형AI를 결합하면서 회사명에 ‘.ai’가 붙는 회사들이 우후죽순 생겨난 탓이다. 하지만 이곳을 떠나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소마 지역으로 가면 사정은 달라진다. 샌프란시스코의 대표 랜드마크인 세일즈포스 타워 웨스트는 건물의 절반 가량이 공실로 몸살을 앓고 있다. 샌프란시스코 남쪽의 스카이라인을 형성하는 오라클 건물도 오라클 본사의 텍사스 이전으로 주인을 잃은 지 오래다.
오랫동안 테크 기업의 성지로 자리매김했던 실리콘밸리의 엑소더스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다. 뉴욕타임즈(NYT)에 따르면 지난해에만 캘리포니아 지역에서 65만3000여명이 다른 주로 이주했다. 팬데믹 기간인 2020년 인구가 처음으로 26만명 감소하면서 순감소세로 돌아선 이후 감소폭이 빠르게 늘고 있다.
팬데믹 초기만 해도 엑소더스 현상은 빅테크의 본사 이전과 원격 근무에 따른 테크 노동자들의 이동 수준에 머물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이 현상이 고착화되면서 스타트업 생태계로서 실리콘밸리의 아성까지 위협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브라이언 오펏 인덱스 벤처스 파트너는 “5년 전만 해도 스타트업의 90%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창업했다”며 “이제는 이 비중이 70% 수준으로 떨어졌다”고 전했다. 초창기에 자금조달과 인력 확보를 위해 실리콘밸리에서 창업을 하더라도 투자 유치 이후에 본거지를 옮기는 경우도 많다는 분석이다.
피치북 데이터에 따르면 전체 벤처캐피털(VC) 투자 금액에서 실리콘밸리가 차지하는 비중은 2012년 이후 가장 낮은 수치를 기록했다. 지난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에 투자된 VC 펀딩 규모는 749억 달러(3206건)를 기록해 팬데믹 초기인 2020년 대비 19% 성장하는 데 그쳤다.
이 기간 가장 높은 성장률을 기록한 곳은 플로리다주의 마이애미로 53억9000만 달러를 기록해 이 기간 278% 늘었다. 마이애미의 경우 블록체인, 웹3 분야의 스타트업 비중이 늘어나고 있다. 이어 2위를 차지한 일리노이주의 시카고는 102억 달러(231%), 덴버는 37억5000만 달러(123%) 순으로 나타났다. 테슬라, 오라클 등이 본사를 이전하면서 차기 실리콘밸리로 꼽히는 텍사스 오스틴은 49억5000만 달러를 기록해 같은 기간 77% 상승했다.
이달 초 샌프란시스코 길거리에서 피습 사망한 밥 리 전 스퀘어 최고기술책임자(CTO)도 지난해 말 샌프란시스코에서 플로리다주 마이애미로 이주했다가 출장길에 참변을 당하면서 안타까움을 더했다. 그의 지인들은 리 전 CTO가 “치안이 위험해진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마이애미에서 웹3와 관련한 큰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 거주지를 옮겼었다”고 전했다.
실리콘밸리의 살인적인 물가와 더불어 높은 소득세·법인세를 비롯해 주정부의 높은 규제도 테크 인구를 등떠밀게 하는 요인이다. 특히 최근 몇년 사이 샌프란시스코의 치안 정책을 두고 민주당 소속의 런던 브리드 샌프란시스코 시장과 테크업계 사이에 마찰도 커지고 있다. 이 가운데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와 텍사스주 오스틴은 기업들을 유인하기 위한 공세를 펼치고 있다. 프랜시스 수아레즈 마이애미 시장은 일론 머스크 테슬라 최고경영자(CEO)를 비롯해 잭 도시 트위터 창업자 등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며 테크 기업들이 이주할 경우 시정부에서 ‘컨시어지 서비스’를 전담하는 책임자를 두도록 하겠다고 공약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AI붐이 오히려 실리콘밸리라는 곳만의 힘을 분산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도 나온다. 워싱턴포스트(WP)는 “AI의 발전으로 어디에서 창업을 하느냐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아지고 원격으로 인력을 조달할 수 있다”고 짚었다. 글·사진(샌프란시스코)=정혜진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