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26일 미국을 국빈 방문해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한미정상회담을 한다. 새 정부 출범 1주년을 앞두고 열리는 이번 정상회담은 한국 외교·안보전략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미 관계는 지난 70년간의 대북 중심 군사 동맹에서 벗어나 포괄적 전략 동맹이라는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 이번 한미회담에서는 이에 걸맞게 북한 핵·미사일에 맞선 확장 억제는 물론 자유민주주의 가치 연대의 리더 국가로서 한미일 안보 협력, 반도체 등 경제안보, 원자력 협력, 방위산업 수출 협력,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및 인도태평양 국가들과의 연대에 이르는 포괄적 주제들이 다뤄질 것이다.
이번 한미회담을 계기로 양국이 논의해야 할 과제는 단기와 중장기로 나눠볼 수 있다. 현재 대통령실을 중심으로 추진 중인 핵심 의제는 한미 확장 억제의 효율성 제고와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경제안보와 관련한 논의다. 이 둘은 이번 한미회담의 단기 의제로 다뤄질 예정이다. 중장기 과제는 한미 원자력 공동 수출을 위한 협력, 방산 수출을 위한 세계시장 전략, 파이브아이즈(영미권 5개국의 정보공유 동맹) 가입을 위한 미국의 지원, 반도체 차세대 연구개발(R&D) 공동 투자, 한국의 국제 위상 강화를 위한 주요 8개국(G8) 가입 관련 미국의 지원, 한미 원자력협정 개정, 유엔사령부의 미래 역할 등이 있다.
예를 들어 한미 원자력 공동 수출을 위한 협력과 관련해 중국·러시아의 원자력 에너지 시장 확장을 막는다는 총론에서는 합의를 이뤘다. 한국형 원자로 ‘APR1400’의 원천기술에 대한 지식재산권(IP)을 주장하는 미 웨스팅하우스에 어느 정도 수익을 배분해야 하는지 등과 같은 각론 부분은 앞으로 속도감 있게 논의해야 한다. 미 의회에서 지지하는 한국의 파이브아이즈 가입에 대해서도 구체적인 논의를 진행해야 한다.
논의 채널은 단기 과제와 중장기 과제에 따라 정부 중심의 트랙1과 민관 협력인 트랙1.5로 구분해야 한다. 예를 들어 경제와 산업 영역이 광범위하게 포함된 경제안보와 방산 수출, 원자력 공동 수출 등에 대한 논의는 트랙1뿐 아니라 핵심 이해 관계자인 양국 기업들과 지자체 등이 포함된 트랙1.5 협의체에서 병행하는 것이 좋다. 안보와 군사 영역이라도 보안에 관한 사항이 아니면 전직 인사들과 전문가들이 포함된 정책 중심의 트랙1.5 채널을 가동해야 한다.
이때 소통 채널 참가자는 막연한 국제 관계 현상이나 경제정책의 이론에 치중하는 학자보다 실제로 정책을 다뤘던 전직 인사들과 정책 커뮤니티 중심의 전문가들로 구성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트랙1에서는 대개 관료들 간에 사전에 구체적인 의사 확인 없이 예정된 논의만 벌이기 때문에 소통에 어려움이 생길 수 있다. 이해관계가 치열한 경제·군사 관련 사안, 예를 들어 원자력 공동 수출 전략 및 모델 수립이나 유엔사의 미래 역할 같은 예민한 문제들은 트랙1.5를 통해 우선 합의 가능한 여러 정책 메뉴들을 도출한 후 양국 정부 관계자의 의사를 확인하고 다시 담론을 형성해가는 방식이 바람직하다. 이 과정에서 상호 견해 차가 좁아지면 트랙1으로 옮겨 본격적인 논의를 이어갈 수 있다.
과거 한미회담이 열리면 우리 정부는 국내 총선 등을 염두에 두고 가시적 성과물에 집중하는 경향이 있었다. 회담의 단기 성과가 무엇이며, 약속한 내용이 무엇이냐 등에 대한 부담이 컸다. 회담의 직접적인 성과를 제시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다. 그러나 글로벌 중추 국가로서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과의 관계에서는 단기 성과보다 중장기 전략에 대한 합의가 우선해야 한다. 미 행정부는 키다리 아저씨도 아니고 교황이나 유엔 사무총장도 아니다. 논리로 설득하려 하지 말고 무엇을 먼저 제공할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그래야 장기적으로 큰 것을 되돌려받을 수 있다. 미국이 힘을 써 우리나라가 G8 국가의 일원이 되거나 파이브아이즈에 가입할 수 있다면 국익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다.
이렇게 그랜드바겐 방식으로 선 양보 후 취득하는 국가들이 일본·사우디아라비아·이스라엘 등이다. 이들은 안보에 대한 기여를 통해 경제적으로 보상을 받거나 이를 국제적 지위를 얻는 기회로 삼는다. 반대로 경제적 기여나 외교적 양보를 통해 안보 등의 분야에서 지지를 받는 것도 가능하다.
바이든 대통령의 최대 관심사는 내년 대선에서 이겨 재집권하는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협상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이 재집권에 성공하도록 최대한 그들의 입장에서 절실한 것은 지원하고 급하지 않은 사안은 다음 기회에 협상해야 한다.
바이든 대통령은 현재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기소, 대(對)중국 정책, 경제 실적 등과 관련해 정치적 어려움을 겪고 있다.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 다르게 바이든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국민의 온전한 지지보다 트럼프 대통령 2기를 막기 위한 선택지로 선출됐다는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바이든 대통령 지지자는 트럼프 전 대통령에게 반대하기 위해 투표했지만 트럼프 전 대통령 지지자는 그를 지지해 투표했다. 이런 이유로 바이든 대통령은 공화당 및 트럼프 전 대통령의 비판을 최소화할 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다. 지지율이 저조해 급진적 정책은 진행할 엄두도 내지 못한다. 외교정책도 결국 착한 트럼피즘(트럼프 전 대통령이 내세운 자국우선주의와 대동소이)일 뿐이어서 IRA나 반도체와 관련해 통 큰 양보를 이끌어내기는 어렵다. 따라서 경제 측면에서는 길게 보고 한미 차세대 반도체 공동 R&D 투자 등으로 우리 국익을 확보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 또 안보·군사 측면에서도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에 유화적이고 약하다는 공격을 받는 점을 고려해 공감대를 확보한 다음 한국의 자주국방과 대북 정책을 위한 이해를 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년 미국 대선 이후를 대비해 집권 가능성이 있는 상대방을 미리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것도 필요하다. 한국은 항상 대선이 끝난 뒤 분주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다. 정부 부처가 직접 다루기에 예민한 부분은 트랙2의 공공외교 쪽에 넘겨 현재 야당의 핵심 인사들을 관리해야 한다.
내년에 누가 집권하든 대비가 돼 있어야 한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관련 인사들과 교류의 장을 만들 필요가 있다. 트럼프 행정부 시절 인사들로 구성된 미국우선주의정책연구소(American First Policy Institute)가 주요 접점이 될 수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딸인 이방카 트럼프와 그의 남편인 재러드 쿠슈너, 친(親)트럼프 성향의 상하원 의원들, 공화당의 주요 인사들, 공화당 기부자들과 유대 관계를 맺어야 한다. 대선이 끝나고 줄을 대는 식의 후진국형 외교는 끝내고 누가 집권하든 한국 편에 서줄 인사를 민주당과 공화당 양측에 육성해야 한다. 일본과 이스라엘처럼 누가 집권하든 한국에 유리한 판을 만들어야 한다.
미국 정보기관의 한국 도감청 의혹은 오히려 한미 동맹을 강화하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한미가 글로벌 포괄적 전략 동맹으로 미국·영국, 미국·이스라엘, 미국·일본, 미국·앵글로색슨국가 등과 같은 1급 동맹을 지향한다면 이번 일을 계기로 정보 공유에서도 1급 동맹을 제의하는 역발상을 할 수도 있다.
김영준 교수는
영국 킹스칼리지런던대에서 안보정책학 석사, 미국 캔자스대에서 국제정치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싱크탱크인 국립아시아연구국 객원연구원, 국방대 안전보장대학원 교수로 있다. 대통령실, 국가안보실, 국회, 국방부, 외교부, 합동참모본부, 국가정보원, 통일부, 미국 상하원, 미 국무부, 미 국방부, 한미연합사령부 등에 정책 자문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