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무용 휴대폰의 대명사 ‘블랙베리’의 흥망성쇠를 다룬 영화가 올해 베를린 영화제에서 공개된 이후 사우스바이사우스웨스트(SXSW) 관객상, 샌프란시스코 영화제 수상 등 화제를 낳고 있다. 톡톡 눌러 입력하는 쿼티 키보드 만큼이나 매니아층이 두터운 캐나다 출신 감독 맷 존슨(37)의 패기가 돋보이는 영화 ‘블랙베리’다. 캐나다 영화계의 자뻑 지존 ‘고딩감독’(2013)으로 데뷔한 존슨 감독은 “처음으로 블랙베리를 손에 든 건 촬영장에서였다. 아버지가 사용했다는 건 알았지만 블랙베리 문화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다”며 자신은 ‘팜 파일럿’ 사용자였다고 밝혔다.
캐나다 기업이 개발한 블랙베리는 ‘스마트폰의 원조’로 2000년대 컴퓨터 없이 휴대폰으로 이메일 확인이 가능했던 개인용 디지털 단말기(PDA)다. 한 손에 쥐는 기기로 오밀조밀한 쿼티 자판이 달려 있는 디자인과 이메일 송수신 기능이 블랙베리의 강점이었다. 자체 운영체제 덕택에 보안을 중시하는 기업 직원과 정치인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그러나 애플의 소비자 혁명으로 인해 블랙베리는 한순간에 몰락했다.
지난해 출시된 넷플릭스 6부작 ‘플레이리스트’가 합법적인 음원 스트리밍 플랫폼을 만들어 음악 산업계에 혁신을 일으킨 스웨덴 기업 스포티파이의 창업 비화를 그렸다면 영화 ‘블랙베리’는 영광에 취해 혁신을 멈춘 스마트폰 선구자의 몰락을 그렸다. 블랙베리 탄생에서 퇴출에 이르기까지 10년의 영광을 빠른 속도감으로 122분의 러닝타임에 담아낸 존슨 감독은 “대사가 정말 많은 시나리오였는데 영화 흐름이 빨라진 것은 리듬감 있는 편집의 묘미”라며 “카메라 2대로 동시 촬영한 것도 유용했다”고 말했다.
캐나다 신문기자 재퀴 맥니시와 션 실코프가 공동 집필한 ‘시그널 손실’(2016)이란 원작이 있었지만 맷 존슨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 속으로 사라진 블랙베리 공동창업자와 직원들을 인터뷰하며 8개월에 걸친 탐사 취재를 통해 시나리오 각색 작업을 마쳤다. 블랙베리의 공동창업자인 덕 프레긴과 초창기 멤버의 합성 인물인 괴짜 캐릭터 더그 역도 직접 연기했다.
캐나다 온타리오주 출신의 맷 존슨 감독은 온타리오주에서 태어나고 퀘벡 몬트리올에서 성장한 배우 제이 바루첼과 함께 캐나다인 스탭을 꾸리고 친한 이들과 함께 ‘블랙베리’를 만들었다. 존슨 감독은 “토론토에서 6명이 영화를 만들던 황금시대는 더 이상 없다. 하지만, 영화를 통해 캐나다 문화를 정의하려는 시도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최대의 결점은 영국계 캐나다인이 문화적 언어를 정의하지 못한 것이다. 사실 미국에서 활동하는 훌륭한 감독들 중 다수가 퀘벡 출신의 프랑스계 캐나다인들이다. 나 같은 영국계 캐나다인의 영화가 문제인데 아메리카니즘의 모방품이라는 지적에서 벗어나려고 씨름한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토론토 스타일의 미적 감각을 고수하고 너무 멀리 벗어나지 않기를 원했다”며 “많은 영화학도들이 미국의 영화제작 방식을 본받아야 하고 이 모든 스타일들을 모방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하지만 제작 방식을 모방하면 사악하게도 문화 속까지 스며든다”며 자신의 독특한 스타일을 찾아내고 이를 고수하는 노력을 더 중시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하은선 미주한국일보 편집위원, HFPA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