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늙은 왕은 용맹했으나 노쇠했기에 세 딸에게 몸을 맡기고 안식을 추구하려 한다. 아버지를 향한 사랑을 화려한 언변으로 수식하는 첫째 딸과 둘째 딸. 그러나 왕이 가장 아끼던 막내딸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만큼만 사랑할 뿐, 더 할 말이 없다’고 답변한다. 노기에 찬 왕은 막내딸과 절연을 선언한다.
한 인간의 몰락을 그린 셰익스피어의 비극 ‘리어왕’이 명배우 이순재(89)와 함께 돌아왔다. 지난 1일 LG아트센터에서 개막한 연극 ‘리어왕’은 2021년 초연에 이은 재연으로, 이 작품에서 이순재는 연극 사상 최고령 리어왕에 도전한다.
200분에 달하는 연극에서 가장 눈에 띄는 점은 정통극의 면모다. 장대한 분량에 걸맞게 기원전 8세기 고대 브리튼 왕국의 복장과 문화를 충실히 재현했다. 앞서 지난달 기자간담회에서 김시번 연출은 “셰익스피어가 1600년도 초반에 자신들의 조상 이야기를 극화한 것이 ‘리어왕’이다”라면서 “의상이나 소도구 등 분위기를 르네상스나 중세가 아닌 고대에 맞추려고 노력했다”고 밝혔다.
정통극이지만 고전 속 예스러운 단어를 쉽게 풀어냈다. 극 중에서 ‘켄트 백작’이 차는 형구는 ‘차꼬’가 아닌 ‘족쇄’로 표현된다. 이에 대해 이번 작품에서 예술감독을 맡기도 한 이순재는 “셰익스피어의 중요한 부분은 다이얼로그 속에 있는 문학성과 철학성”이라면서 “우리 말 가운데 어떤 어휘가 정확한지 풀어내서 전달하는 게 우리 몫이다. 관객이 봤을 때 정확히 알아들을 수 있도록 풀어서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왕실 한편에선 음모가 진행되고 무지에서 비롯된 비극이 몰아친다. 광기에 젖어드는 이순재의 연기가 극을 이끈다. 고령의 나이에도 리어왕의 긴 대사량을 무리 없이 소화하며 왕의 기백을 표현한다. 초반부 변덕스러운 성미뿐 아니라 모든 것을 잃고 처량함에 잠긴 왕의 말로를 입체적으로 그렸다. 막내딸 ‘코딜리아’의 마지막을 앞두고 내뱉는 독백에는 딸을 향한 회한과 애정이 절절히 묻어난다.
다른 배우들의 각양각색의 연기도 보는 재미를 선사한다. 리어왕의 닮은 꼴인 최종률이 연기한 ‘글로스터 백작’도 살을 깎는 고통을 생생히 표현한다. 신경질적인 첫째 딸 ‘고너릴’ 역의 권민중과 약삭빠른 성격의 둘째 딸 ‘리건’ 역의 서송희의 대화 또한 현실감을 담았다. 리어왕의 대척점에 섰지만 이들 또한 이해의 실마리를 지닌다. 길지혁이 분한 ‘광대’의 입을 빌어 나온 ‘헛소리’들은 대개 의미 없는 말장난으로 다가오지만, 때론 상황을 꼬집으며 관객의 웃음을 자아낸다. 김인수가 맡은 고너릴의 심복 ‘오스왈드’는 감초 역할을 톡톡히 한다.
평이한 느낌을 주는 1막에 비해 2막의 무대는 광야의 질감을 담은 무대 장치가 돋보인다. 군상극 속에서 쌓인 갈등의 발단이 2막에서는 폭풍우처럼 휘몰아친다. 오는 1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