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 휴셈 대표는 국내 남자골프 선수들 사이에서 유명 인사다. 큰형이자 사장님, 그리고 캐디로 1인 3역을 소화한다. 선수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인생 고민을 들어줄 때는 영락없는 큰형이다. 주변에 가능성은 있지만 형편이 어렵다는 선수가 있으면 별 조건 없이 대회 경비 등을 지원해 준다. 그러다 가끔은 코스에서 선수들 백을 메고 땀을 뻘뻘 흘린다. 소속 선수들을 위해 회사 사무실을 골프연습장 건물로 옮긴 열혈 후원자다.
지난 5월 KPGA 투어 SK텔레콤 오픈에서 첫 우승을 달성한 백석현은 그동안 후원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시상식장에서 이철호 대표에게 큰절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이 대표는 백석현과 대회 기간 내내 함께 숙소를 사용하며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둘은 6월 초 KPGA 선수권에서는 선수와 캐디로 나흘간 코스를 누볐다. 이철호 대표의 이렇듯 각별한 골프사랑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그가 운영하는 휴셈(HUSEM)은 반도체 장비 부품을 만드는 회사다. 휴셈은 주로 일본산이던 반도체 설비 부품을 국산화하면서 ‘한 단계 높이자(High Up Semiconductor Engineering Material)’는 의미로 이 대표가 2007년 설립했다. 일반 소비자가 아니라 기업을 상대하는 B2B 업체다. 그런 그가 골프선수를 후원하게 된 건 자신이 어려운 시절을 절절히 겪어봤기 때문이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단칸방에서 홀어머니, 누나, 동생과 함께 살던 이철호 대표는 대학 졸업 후 현대전자(현 SK하이닉스)에 들어갔다. 장남이었던 이 대표는 가난한 집안을 조금 더 일찍 일으키려 입사 7년 만에 회사를 뛰쳐나와 창업했다.
결과는 실패. 그는 “다행히 망했다”고 했다. “30대 중반이었어요. 그때는 제 맘대로 모든 게 다 될 줄 알았죠. 근데 사업 실패하면서 인생을 알게 된 겁니다. 신용불량자 신세가 되니까 그 많던 사람들이 다 떠나더군요. 진짜 소주 한 병 살 돈이 없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나마 젊었기에 일어설 힘이 조금은 남아 있었다. 이를 악 물었다. 그때 반도체 관련 사업을 하던 지에스티산업의 육영성 대표가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육 대표님이 물건도 대주시면서 다시 힘을 내라고 많은 조언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도움이 없었다면 사실 일어나기 힘들었을 겁니다.” 육영성 대표는 배우이자 6인조 보이그룹 비투비에서 서브보컬을 맡고 있는 육성재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골프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요?
“재기에 성공한 후에 사업상 자연스럽게 골프를 하게 됐어요. 아들도 운동을 하는 ‘골프대디’이기도 했고요. 그런데 주변에서 조금만 도움을 주면 성공 가능성이 큰 프로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저 역시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작은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깨달았죠. 대기업처럼 큰돈은 못 주더라도 투어 경비 정도는 지원할 수 있겠다 싶어 후원하게 됐습니다.”
그렇게 맨 처음 후원을 시작한 게 2014년 문경준이다. 생활에 안정을 찾은 문경준은 운동에만 전념하게 되면서 기량이 상승했고 2015년 매경 오픈에서 첫 우승을 달성했다. 대회장인 남서울CC의 회원이던 이 대표는 한 달 간 예약을 해 문경준과 함께 플레이를 하기도 했다. 이후 ‘식구’가 늘어 그동안 휴셈을 거쳐 간 선수가 20명이 넘는다. 이번 시즌에는 백석현, 장익제, 최이삭이 메인 후원 선수로 활약하고 있고 김봉섭, 김기환, 박배종과는 서브 후원 계약을 맺고 있다.
-선수들 백은 언제부터 멨나요.
“5년 전부터예요. 매경 오픈을 앞두고 최이삭이 부탁을 하더라구요. 사장님이 남서울CC 그린을 잘 아시니까 도와달라는 거였어요. 그 다음부터 선수들이 하나둘 요청하는데 누구는 들어주고 누구는 안 들어줄 수 없어 스케줄이 맞으면 해 줍니다. 올해 매경 대회 때는 김봉섭 캐디를 했어요. 7년 동안 컷 통과를 못하다 올해 컷 통과를 하더니 우승한 것처럼 좋아해요. 본인은 그동안 그린 브레이크를 다 잘못 보고 있었대요. 하하. (백)석현이는 우승 뒤 KPGA 선수권을 도와달라고 해서 함께 했고요.”
-소속 선수들 캐디를 하다 보면 가끔 불편한 점은 없나요.
“선수들이 다들 편하다고 해요. 물어보기 전까지 제가 이래라 저래라 말을 잘 안 하거든요. 처음에는 실수도 많았어요. 깃대 들고 다음 홀로 이동하는가 하면 골프백을 그린에 놔두고 오기도 하고요. 오랫동안 인연을 맺은 선수들은 스윙을 봐달라고 할 때도 있어요. 자기들은 미처 느끼지 못하던 걸 제가 가끔 콕 찍어서 얘기해 준다고 해요.”
-SK텔레콤 오픈에서 우승한 백석현이 시상식장에서 큰절을 올려 화제가 됐는데요.
“아무도 자기를 안 쳐다볼 때 제가 도와줘서 고맙다며 절을 하겠다는데 얼떨결에 받았습니다. 2014년 처음 선수들을 지원하기로 마음을 먹었을 때는 과연 내가 언제까지 할 수 있을까 했는데 벌써 10년을 채웠습니다. 이번에 그 보람을 느끼고 추억도 됐습니다.”
-축하인사도 많이 받았을 텐데요.
“우승 직후 핸드폰이 먹통이 됐어요. 1000여 통의 축하 메시지가 일제히 들어오니까 핸드폰이 감당을 못한 거죠. 첫날부터 선두를 달린 덕에 저 아는 사람들이 우승 기대를 하고 있다가 한꺼번에 보낸 거예요. 제가 우승한 것도 아닌데 지금까지도 축하인사를 받습니다.”
백석현이 우승할 때 이 대표는 캐디를 하지는 않았지만 함께 숙소에 머물며 라면 끓여주고, 커피 타주고, 설거지 하고, 기사 역할까지 하는 등 뒤에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한 가지 일화도 있다. 대회 개막 전날 숙소 근처 고깃집에 갔는데 1라운드 성적이 좋았다. 그 기운을 그대로 이어가고 싶어 이튿날에도 그 식당에 또 갔다. 역시 성적이 좋자 대회 기간 내내 그 식당만 방문했다. 그런 뒤 마침내 우승을 하고선 둘이서 그 식당에서 조촐한 파티를 열었다. 이 대표는 아마 내년에는 타이틀 방어하려고 그 식당에 또 갈지도 모른다고 했다.
-백석현과는 어떤 인연으로 만나게 됐나요.
“선수들과 태국으로 동계훈련을 가곤 했는데 그곳에서 처음 봤어요. 얼굴이 새까맣고 태국말도 잘해서 처음에는 현지인인줄 알았는데 저희 선수들이 ‘사장님, 얘 한국 사람이에요’ 그러더라고요.”
중학교 시절 아버지 사업 때문에 온가족과 함께 태국으로 떠났던 백석현은 그곳에서 주니어 시절을 보냈고 프로 생활도 시작했다. 태국 싱하 투어에서 5승을 거둔 인연으로 싱하그룹의 지원을 받았다. 한국 선수로는 유일하다. 지금도 백석현의 상의 왼쪽 팔에는 싱하그룹 로고가 박혀 있다. 에피소드도 있다. 백석현이 태국어를 워낙 유창하게 해서 싱하그룹은 그가 당연히 태국인인 줄 알고 후원을 결정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인이었다는 것이다. 아시안 투어와 일본에서 활동하던 백석현은 코로나19가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2020년 KPGA 2부 투어를 뛴 뒤 시드전을 거쳐 2021년부터 코리안 투어에 본격적으로 합류했다. 당시 그를 한국으로 불러들인 게 이철호 대표다.
-후원 선수들과 스킨십을 자주 갖는다고 들었어요. 주로 어떤 얘기를 하나요.
“일상적인 것들입니다. 골프 실력은 그들이 나보다 훨씬 낫지만 인생은 제가 선배고 경험한 것도 많잖아요. 살아가면서 도움이 될 만한 얘기들을 해줘요. 가장 강조하는 건 인성이에요. 남을 돕고 배려할 줄 알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하죠.”
-휴셈이 후원하면 선수들이 잘 풀린다는 얘기도 있습니다.
“그러게요. 문경준과 백석현이 첫 우승을, 그것도 큰 대회에서 해서 그런 말이 나오는 것 같아요. 작년에 잠시 함께했던 윤성호도 저희 모자를 쓰면서 성적이 나아졌고, 장익제는 올해 4월 일본 시니어 투어에서 첫 우승을 했어요.”
-직접 KPGA 챔피언스 투어에 나간 적도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지난해 2개 대회에 나갔었죠. 다행히 꼴찌는 안 했습니다. 첫날에는 완전 쫄았는데 둘째 날에는 제 뒤에 몇 명 있더군요.”
-올해는 출전 계획이 없나요.
“안 그래도 (장)익제한테서 얼마 전에 연락이 왔어요. 7월에 함께 챔피언스 투어에 나가자고요. 첫째와 둘째 주에 연달아 나가볼 생각입니다. 지난해에는 프로 선발전에도 한 번 도전했어요. 올해도 하반기에 다시 나가보려 해요.”
-베스트 스코어는 어떻게 됩니까.
“3년 전부터 2부 투어에도 가끔 나가는데 그곳에서 76타 친 게 최고 성적이에요. 제일 긴 티잉 구역에서 치다 보니 이제는 레귤러 티에서 치면 오히려 성적이 더 안 나와요. 하하.”
후원 선수들에게 보다 나은 연습 환경을 만들어주고 이 대표 본인도 틈틈이 연습을 위해 휴셈은 5년 전 본사를 경기 성남 분당의 남서울제2골프연습장 건물 3층으로 옮겼다. 회사 안에 웨이트 트레이닝 시설, 라운지, 라커 등이 갖춰져 있다. 라커 문을 열면 곧바로 휴셈 전용 타석이어서 선수들은 대회가 없을 때는 이곳에서 마음껏 클럽을 휘두른다.
이 대표는 2015년 소속 선수들과 함께 베트남 전지훈련지에서 제1회 ‘휴셈 챌린지’를 연 이후 2020년까지 10회를 열었다. 1박2일 동안 친한 선후배들이 모여 스트레스 없이 골프를 즐기고 서로 소통하는 시간을 갖는다. 약 40명 규모로 치르는데 선수들 사이에 소문이 나면서 너도나도 끼워 달라고 부탁할 정도가 됐다. 코로나19와 최근 반도체 불황으로 잠시 중단됐지만 조만간 부활시킬 예정이다.
-요즘 사업은 어떤가요.
“반도체 경기가 좋지 않아요. 특히 미국과 중국 대립으로 타격이 커요. 중국 법인은 지난해 10월부터 매출 제로예요. 그래도 버텨야죠. 골프도 어제까지 잘 됐다가 어느 날 갑자기 망가지는 경우가 허다하잖아요. 조급함 내지 않고 차분하게 대처하다 보면 다시 줄버디 잡는 날 오지 않겠어요?”
[서울경제 골프먼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