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은 마음의 문을 열고 따스히 받아드리는 것.’
한국의 대표적인 여류 추상화가 최욱경(1940~1985)의 시집 ‘낯설은 얼굴처럼’의 첫 장에 쓰여진 문구다. 작가는 1972년 첫 번째 미국 체류를 마치고 잠시 한국으로 돌아와 활동하던 중 유학시절 쓴 45편의 시와 16점의 삽화를 엮어 이 시집을 발간했는데, 작가 스스로 ‘뿌리를 흔드는 경험’이라 표현했을 만큼 당시의 생경한 환경과 자극이 잘 드러나있다.
이제는 헌책방에서조차 찾아보기 힘든 이 시집 속 삽화로 소개된 흑백 드로잉 작품을 잔잔히 감상할 수 있는 전시가 25일 부산에서 열렸다. 부산 국제갤러리는 이날부터 10월 22일까지 최욱경의 개인전 ‘낯설은 얼굴처럼’을 진행한다.
최욱경 전시회가 부산에서 열린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국제갤러리와는 네 번째 작업이라고 한다. 이번 전시에 소개된 작품은 흑백 종이작업 26점과 크로키(인체 드로잉) 8점이다.
드로잉이라니 어쩐지 재미없게 느껴지지만 작품은 채색화 못지 않게 꽤 흥미진진하다. 사실 최욱경의 채색화는 강렬하다. 빨강, 노랑, 검정 등 강한 색을 사용해 커다란 야수를 네모난 상자에 구겨 넣은 듯 성나 있다. 최욱경의 채색화 작품을 기대한 이들에게 이번 전시는 생경할 수 있다.
하지만 작품 속에 적힌 ‘심장은 외로운 마음 안에 있다(Heart is in the lonely heart)'나 ‘때가 되면 해가 뜰까(When the time comes will the sun rise)' 등의 텍스트 덕분에 작품은 보는 이에게 채색화 이상의 다채로움을 선사한다. 이는 종종 그가 의식의 흐름 중 즉흥적으로 내뱉은 단순한 언어에 불과하지만 마치 시화처럼 ‘글’이 주인공인 그림이 되어 보는 이의 감성을 자극한다.
최욱경은 남성 일색인 한국 미술계를 벗어나 작가로서의 역량을 확장하기 위해 1963년 서울대 졸업 이후 유학을 결심한다. 미국 유학 시절 그간의 그림 방식에서 벗어나 다시 기본으로 충실하자는 의미로 시작한 드로잉은 끝없는 연습이 되었고, 다양한 매체를 실험하던 작가 개인의 고뇌를 담아낸 작품을 남길 수 있었다. 이번 전시의 드로잉은 작가의 고독한 미국 생활 중 일상을 채우던 생각의 파편을 보는 듯하다.
한편 전시장 한 켠에 놓인 그의 시집 ‘낯설은 얼굴들처럼’도 감상해 볼만하다. 새로운 언어 환경에 놓인 최욱경은 정체성의 혼란 속에서 시를 쓰며 감성을 언어로 형상화 했는데, 이 과정은 그의 작품과 문학을 더욱 긴밀하게 연결시키는 계기가 됐다.
글·사진(부산)=서지혜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