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시간 투자와 혁신을 꺼린 채 ‘이익 쌓기’에만 골몰하던 일본 기업들이 잠에서 깨어나고 있다. 위기를 인지하지 못하고 서서히 익어 죽음을 맞이하는 ‘냄비 속 개구리(ゆでガエル)’에 비유되던 기업들은 과감한 사업 재편과 첨단 기술 도입 등에 앞장서며 냄비 밖 탈출에 열을 올리고 있다.
◇올해 설비투자 100조 엔 상회=4일 닛세이기초연구원에 따르면 일본 기업들의 올해 명목 설비투자는 지난해보다 5% 가까이 증가한 약 101조 엔으로 추정된다. 명목 설비투자 규모가 100조 엔을 넘기는 것은 1991년 이후 32년 만이다. 연구소는 내년 투자금도 3.8% 늘어 105조 엔 언저리를 기록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2년 연속 100조 엔 이상 달성은 사상 첫 기록이다. 설비투자는 기업의 생산성을 높이는 동력으로 경제성장의 핵심 요소로 꼽힌다. 명목 설비투자가 국내총생산(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2022년부터 17%를 넘고 있다. 이는 경제 부흥기이던 1980년대와 같은 수준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기업들의 변화를 근거로 “장기 불황 속에 쌓아두기 일변도였던 일본 경제가 투자 주도 성장 주기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있다”고 해석했다. 신규 투자보다는 기존 상품·기술의 포장만 바꾼 갱신 투자에 골몰하며 자체 경쟁력은 물론 내수 부진, 투자 억제의 악순환을 초래해온 오랜 관습에서 벗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의 조짐은 다른 정부 통계에서도 확연하게 나타난다. 일본 재무부가 발표한 4~6월 법인기업 통계에 따르면 전 산업(금융·보험업 제외)의 설비투자는 전년 동기 대비 4.5% 증가한 11조 927억 엔으로 집계됐다. 업종에 따라 성장률이 둔화된 부문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전년 동기 대비 신장세를 보였다. 재무부는 이 수치를 바탕으로 “경기가 완만한 회복에서 회복으로 나아가고 있는 상황이 반영됐다”고 해석했다.
기업들의 변화를 끌어낸 배경에는 경기에 대한 긍정적인 전망이 자리하고 있다. 장기 디플레이션하에서는 ‘만약의 사태(불황)’에 대비해 적극적인 투자나 사업 확장을 꺼렸으나 최근 몇 년간 일본 경제를 둘러싼 긍정적인 시그널이 이어지자 새 기회에 올라타려는 기업들이 많아졌다. 일본은행(BOJ)이 올 6월 발표한 2분기 ‘단기 경제 관측 조사’에 따르면 기업들의 경기 체감을 반영한 DI지수는 1분기 1에서 5로 뛰었다. 7개 분기 만의 수치 개선이다. DI지수는 업황을 ‘좋다’고 응답한 비율에서 ‘나쁘다’고 한 비율을 뺀 값으로 경제주체들의 경기 전망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다.
◇반도체·전기차 재기 신호탄=첨단 기술을 중심으로 재편 중인 글로벌 산업 환경도 좋은 기회가 되고 있다. 과거 일본은 1970년대 오일쇼크 당시 ‘설비와 제품의 절전 수요’가 커지는 흐름을 타고 전자 산업에 많은 투자를 해 경쟁 우위를 점했다. 문제는 이후 진행된 기술·산업 변화의 흐름 속에서 경기 침체를 이유로 연구개발(R&D)과 추가 투자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며 글로벌 기업들과의 경쟁에서 도태됐다는 점이다. 자동화·로봇·탈탄소·인공지능(AI) 등 제약 극복형 테마가 세계 시장의 새로운 이슈로 부상한 지금이 ‘제2의 변화’에 올라탈 마지막 기회라는 인식이 기업들에 더욱 절박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다.
반전의 기회를 모색하려는 시도는 이미 시작됐다. 도요타자동차는 올해 1조 8600억 엔을 설비투자에 투입한다. 이는 17년 만에 최고였던 지난해 설비투자액보다 16% 많은 금액이다. 특히 전기차 부문을 강화하기 위해 일본·미국 거점을 보강하는 데 자원을 집중할 계획이다. 소니그룹 역시 이미지센서 사업에 2021~2026년 총 1조 8000억 엔을 쏟아붓는다. 스마트폰용 중심 이미지센서에서 나아가 자동 운전, 물류 시설 자동화 등으로 수요를 확대해 관련 부문 제품을 양산하기 위한 새 공장을 구마모토현에 지을 계획이다. 이 외에도 일본 정부가 첨단 반도체 제조 산업의 부활을 노리며 도요타·소니·소프트뱅크 등 8개 기업과 함께 만든 반도체 회사 ‘라피더스’도 홋카이도 지토세에 양산 거점(공장)을 둔다.
전문가들은 섣부른 전망을 경계하면서도 지속적인 정부 지원과 기업 투자를 통한 변화에 기대의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일본 다이이치생명경제연구소의 나가하마 도시히로 수석이코노미스트는 “경제와 기업의 성장 기대가 높아짐에 따라 설비투자가 확대되면 생산성 향상으로 임금이 오르면서 경제성장의 선순환으로 연결돼 장기 침체에서 빠져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이어 “엔화 약세에다 신흥국에서의 인건비 상승과 경제안보에 대한 의식 강화 등 기업들이 국내 회귀를 결단하기 쉬운 환경인 만큼 국내 투자를 촉구하는 정부 지원책이 계속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