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반도체·전기차·배터리 등을 대상으로 한 ‘인플레이션감축법(IRA)’을 강행한 후 유럽과 일본 등 글로벌 국가들이 잇따라 대항 조치를 내놓으면서 ‘자국 우선주의’가 본격화되고 있다. 세계 각국이 자국의 첨단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자국 기업에 유리한 보조금을 확대하는 한편 다른 국가들에는 규제 장벽을 높이 쌓고 있다.
18일(현지 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독일·프랑스·네덜란드 등 유럽연합(EU) 주요 7개국은 ‘2035년까지 자국의 전력 시스템에서 친환경 발전소가 아닌 발전소를 제외하겠다’는 내용의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기존의 탈탄소 정책에서 더욱 속도를 내겠다는 것이다.
유럽 내 주요 전력 생산국인 프랑스와 독일을 비롯해 성명에 참여한 국가의 전력 생산 비중은 유럽 전체의 절반에 달한다. 이에 공동성명이 강한 실효성을 갖게 될 것으로 분석되면서 2035년 이후 유럽 수준의 강도 높은 규제를 취하지 않을 경우 불이익을 볼 가능성이 커졌다.
네덜란드 에너지부의 로프 예턴 장관은 “동참한 국가들은 상호 연결된 전력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며 “서로 확보한 전력을 배분·활용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EU는 탈탄소 정책은 물론 데이터 수집 규제 등에서도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고 있다. 지난해 도입한 탄소국경세가 대표적이다. EU는 수입품에 역내 생산 제품과 마찬가지로 동일한 탄소 가격을 부과해 자국 산업의 경쟁 우위를 지킬 수 있게 된다. 이와 더불어 데이터의 역외 이동을 제한하는 유럽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에 이어 내년 3월부터는 디지털시장법(DMA)을 시행해 빅테크 기업에 플랫폼으로서 자사 서비스 우대를 금지하는 강력한 게이트키퍼 역할을 주고 위반 시 막대한 벌금을 부과한다.
EU의 이 같은 보호주의 강화에 미국도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됐다. 이날 미 하원의원들은 조 바이든 행정부에 “유럽의 기술 규제가 미국 기업을 불공정하게 타깃으로 삼고 있다”며 “중국과 유럽이 아닌 미국 테크 기업에 불이익을 주려는 의도가 명백하다”는 항의 서한을 보냈다.
로이터가 확보한 서한에서 미 하원의원 21명은 “유럽의 테크 기업 규제는 미국의 경제와 안보 이익에 대해 극심한 타격을 입힐 것”이라며 “테크 분야에서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은 미국의 탄탄한 경제와 근로자들의 안전을 위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알파벳(구글 모회사), 애플 등 미 테크 기업이 다수 포함된 데 반해 중국 기업들은 상당수 제외됐다”며 미국이 집중적인 타깃이 됐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일본도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재생항공연료(SAF), 그린스틸 등 5개 전략산업에 세제 혜택을 확대하는 ‘일본판 IRA’를 이르면 이번 주 발표할 방침이다. 5개 첨단산업과 관련해 일본 내에서 생산·판매하는 기업에 10년간 법인세를 최대 40%까지 감면해주는 방안이 유력하다. 연구개발(R&D) 시설이나 생산공장 유치를 위해 부분적인 감면 혜택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생산 전반에 걸쳐 포괄적인 혜택을 주겠다는 메시지다.
미국은 중국 기업의 지분율이 25%를 넘는 회사는 ‘해외우려단체(FEOC)’에 포함시켜 IRA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으며 항공유의 경우에도 지속가능항공유(SAF)에만 보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중국과 합작 형태로 배터리 공장을 짓고 있는 한국 기업과 정유사들에도 피해가 우려되는 대목이다.
자국 산업을 보호하기 위해 ‘IRA’ 모델로 보조금 혜택을 제공하다 보니 소모적인 출혈 경쟁으로 변질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앤 크루거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 교수는 “과거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벌인 ‘무역 전쟁’이 이제는 승자가 없는 소모적인 ‘글로벌 보조금 전쟁’으로 명패만 바꿔 달았다”며 “글로벌 생산 저하를 비롯해 각국 국민들의 세금 부담 등 부작용이 우려된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