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개봉한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홍채 인식은 결제, 신원 확인, 범죄 적발에 활용된다. 영화 속 주인공은 다른 사람의 눈을 이식해 홍채 인식 감시망을 피하기도 한다. 이렇듯 홍채 정보를 일상에 활용하는 현실이 챗GPT 창시자 샘 올트먼의 월드코인(WLD)으로 앞당겨질지도 모른다. 샘 올트먼은 미래 인공지능(AI) 시대에 인간과 AI를 홍채로 구분하고, AI에 밀려 일자리를 잃은 사람에게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메커니즘을 구상했다. ‘오브’에 홍채를 인증하면 개인 식별 코드(월드ID)를 부여하고 WLD를 기본소득으로 지급하는 방식이다. 블록체인 기술을 일자리 부족과 같은 사회적 문제 해결에 활용하려는 목표로 전세계 업계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생체 정보 관리에 대한 감독, 범죄 악용에 대한 감시 등이 부재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가격 급등한 WLD…빼곡한 대기자 명단
“대기자가 많아 기다리셔야 합니다.”
디센터가 지난달 28일 방문한 서울 중구의 한 카페는 오브에 홍채를 인식하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비트코인(BTC)과 함께 가격이 급등한 WLD를 받기 위해서다. 이틀 뒤면 행사가 종료되는 탓에 방문객들은 급한 기색이 역력했다. 카페 한쪽에 마련된 대기자 명단도 검정 글씨로 빼곡했다. A씨는 “WLD를 받으려 방문한 사람이 우리 지점에만 10배 가까이 늘었다”고 설명했다. 행사 참여를 위해 가입해야 하는 ‘월드’ 애플리케이션(앱)은 트래픽이 몰려 작동이 지연됐다. 일부 방문객은 대기 순번이 많아 집으로 발길을 돌리기도 했다.
기자도 WLD를 받기 위해 앱에 가입하고 오브 앞에 마주 앉았다. 이후 직원의 지시에 따라 오브를 몇 초 동안 응시했다. 기자의 홍채 정보가 인식되는 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앱에 내장된 지갑으로 WLD 10개가 지급됐다. 5일 기준 WLD 1개의 가격은 약 1만 원이다. 앞으로 총 75개의 WLD가 순차 지급되는 점을 고려하면 75만 원을 홍채 정보와 맞바꾼 셈이다. 수령한 WLD는 홍채 인식 하루 뒤부터 현금으로 바꿀 수 있다.
큰 노력을 들이지 않고 가상자산을 받을 수 있는 탓에 행사장엔 장·노년 방문객이 많았다. 카페에서 만난 B씨(73세)는 “코인을 공짜로 준다는 입소문을 들었다. 요즘은 매체보다 입소문이 빠르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 연령대는 시간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이 많아 관심을 더 두는 것 같다”며 웃었다. 지인을 초대하면 WLD를 추가 지급한다는 점도 노년층의 이목을 끌었다. A씨는 “친구를 초대하면 보상을 받을 수 있어 지인을 데려오는 어르신이 많다”고 전했다.
정보 유출·범죄 악용 우려도
다만 일각에선 홍채 정보 유출을 우려했다. 당시 카페에 있던 대학생 C씨(25세)는 “지인이 (가상자산을) 받는다고 해서 따라왔지만 아무래도 개인정보라 불안하긴 하다”고 주장했다. 홍채 정보가 어떻게 활용되는지 알지 못한 채 가상자산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홍채를 인식하러 온 경우도 있었다.
전문가들은 명확한 법적 근거, 고지 없이 수집한 홍채 정보는 범죄에 악용될 소지가 높다고 지적했다. 임종인 고려대 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얼굴 안면 인식도 드론 공격에 악용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생체 정보인 홍채도 악용될 여지가 있다"고 설명했다. 황석진 동국대 국제정보보호대학원 교수는 “(홍채) 정보가 무슨 용도로 사용되고 어떤 사람에게 제공되는지 알 수 있는 정확한 정보가 없다”며 “금융기관은 개인정보 취급 인가자가 별도로 정보를 관리하는데 월드코인이 이를 갖췄을지도 의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홍채는 생년월일, 연락처보다 훨씬 높은 차원의 정보로 신중한 관리가 필요하다”며 “홍채 정보로 금융 거래를 하는 사람의 정보에 제3자가 접근할 수도 있어 민감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개인정보보호위원회는 지난 4일 월드코인을 조사하겠다고 밝혔다. 개인정보 수집 과정이 개인정보보호법에 위반되면 법에 따라 조치하겠다는 방침이다. 가입 동의 과정에서 영문 설명만 제공, 이용자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 생체 정보를 넘겼을 수 있다는 근거로 ‘불완전판매’ 혐의도 두고 있다.
임 교수는 “홍채 정보를 (이용자의) 동의를 받아 수집해도 목적에 맞게 사용하는지, 관리는 제대로 되는지, 폐기는 언제 하는지 위원회가 관리·감독할 의무가 있다”며 “이제야 조사에 착수한 건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지금이라도 위원회가 속도감 있게 조사를 해야 한다”며 “세계적으로 우려가 제기되는 만큼 유엔(UN) 등 기구와 함께 글로벌 이슈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