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유대계 정치인 중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알려진 척 슈머 상원 민주당 원내대표가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평화의 장애물’이라고 공개 저격하며 ‘지도부 교체’까지 꺼내들고 나섰다. 미국 집권당 지도자가 핵심 동맹국 중 하나인 이스라엘의 정치 수반을 공개 석상에서 비난하고 나선 것은 전례 없던 일이다. 가자지구 해법을 두고 파열음을 내던 미국과 이스라엘의 관계가 끝내 미국 정부의 ‘네타냐후 잘라내기’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슈머 원내대표는 14일(현지 시간) 상원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네타냐후 총리는 국가의 이익보다 자신의 정치적 생존을 우선시하면서 길을 잃었다”며 “그가 가자지구 민간인들의 희생을 기꺼이 용인한 탓에 이스라엘에 대한 국제적 지지가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고 외톨이가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어 네타냐후 총리를 하마스, 이스라엘 급진 우파, 팔레스타인자치정부(PA) 수장 마무드 아바스와 함께 역내 평화를 가로막는 ‘4대 장애물’ 중 하나로 언급했다.
격앙된 어조로 쏟아내던 비판은 네타냐후 총리를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이어졌다. 그는 “매우 많은 이스라엘인이 그들 정부의 비전과 방향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며 “이 중대한 시점에서 새로운 선거만이 이스라엘의 건전하고 개방적인 의사 결정 과정을 위한 유일한 길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미 민주당 상원 1인자이자 유대인 출신인 슈머 원내대표는 대표적인 친이스라엘 정치인으로 분류된다. 지난해 10월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한 8일 뒤 상원 대표단을 이끌고 이스라엘을 지지 방문했을 정도다. 그런 그가 전례 없이 높은 수위로 이스라엘을 공격한 사안을 두고 워싱턴 정가는 이스라엘의 ‘선을 넘는’ 행보에 미국 유대계 커뮤니티도 등을 돌리기 시작한 시그널로 해석하고 있다.
‘라마단 휴전’이 불발되는 등 가자지구 해법이 꼬이면서 조 바이든 대통령의 대선 행보에 지장이 생기자 슈머 원내대표가 총대를 멨다는 분석도 나온다. 지금껏 바이든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비난과 국내 유권자들의 반발 속에서도 공개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반격할 권리’를 인정해왔다. 가자지구 분쟁에서 민간인의 희생을 막아야 한다면서도 이스라엘에 계속 무기를 지원하는 이중적 행보를 이어가 ‘학살 공범’이라는 비판도 감수했다. 하지만 지난달 29일 이스라엘군의 발포로 구호품 트럭에 몰린 민간인 100여 명이 사망한 ‘구호 참사’ 이후 기류가 바뀌었다. 특히 이달 9일 바이든 대통령이 가자지구 민간인 밀집 지구 라파 공격에 ‘레드라인(금지선)’을 그었는데도 네타냐후가 “계속 진격할 것”이라고 응수하자 인내심이 바닥났다는 해석이다. 이날도 이스라엘군은 구호품을 기다리던 가자 주민들을 공격해 약 30명이 사망한 것으로 확인됐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사안에 대해 “바이든 대통령과 슈머 원내대표 등 (이스라엘에) 호의적이던 인사가 네타냐후 총리에 대한 인내심을 잃었다는 신호”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그동안 이스라엘에 적용하던 ‘공적으로는 포용, 사적으로는 압박’ 전략이 끝난 것이라는 진단도 추가했다. 이스라엘에 대한 공개 압박을 통해 ‘네타냐후 잘라내기’를 본격화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미국이 이스라엘에 보내는 연간 38억 달러(약 5조 원) 규모의 무기 원조를 조건부로 제공할 가능성도 거론된다.
다만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내에서 “타국 내정에 지나치게 간섭하는 것”이라는 비판이 나와 갈등의 불씨가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제기된다. 이날 미치 매코널 공화당 상원 원내대표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스라엘 지도자의 제거를 요구하는 것은 기이하고 위선적”이라고 논평했다. 이스라엘 집권 리쿠르당 역시 “이스라엘은 ‘바나나 공화국’이 아니라 네타냐후 총리를 선출한 독립적이고 자랑스러운 민주국가”라면서 “슈머 원내대표가 이스라엘의 선출된 정부를 존중하기를 바란다”며 반발했다. ‘바나나 공화국’은 정부 운영이 엉망인 국가를 경멸하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