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전공의들의 면허정지 처분을 완화하고 의사들과 대화를 추진하라고 지시했지만 의료계 반응은 싸늘했다. 집단 사직을 결의한 대다수 의과대학 교수들은 2000명 증원을 백지화하지 않으면 대화가 무의하다며 강경한 태세를 고수하고 있다.
25일 의료계에 따르면 전국의대교수협의회(전의교협)는 오늘 오후 브리핑을 통해 전일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의 비공개 간담회 관련 공식 입장을 내놓을 전망이다.
전의교협 회장단은 전일(24일) 오후 서울 세브란스병원에서 한 위원장과 50분가량 비공개 간담회를 가졌다. 한 위원장은 간담회 직후 "국민들이 피해 볼 수 있는 상황을 막아야 하기 때문에 정부와 의료계 간 건설적 대화를 중재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고 발언했다.
이후 대통령실을 통해 윤 대통령이 한덕수 총리에게 "(전공의들의 면허정지 행정처분과 관련) 당과 협의해 유연한 처리 방안을 모색해달라"고 당부하면서 5주 동안 이어져 오던 강대강 대치에 변화의 조짐이 생겼다.
이 같은 지시가 한 위원장 요청에 따른 것으로 알려지자 일각에서는 의정갈등의 출구가 마련될지 모른다는 희망적인 반응도 흘러 나왔다. 25일은 이달 초 가장 먼저 면허정지 사전통지서를 받은 전공의들의 의견 제출 마감일이다. 이들이 끝내 의견을 내지 않으면 정부는 26일부터 바로 면허를 정지시킬 수 있다. 서울대를 포함한 전국 의대 교수들이 일제히 사직서를 던지기로 결의한 날이기도 하다.
서울의대교수 비대위는 대통령실 발표 직후 입장문을 통해 "전공의에 대한 압박 중 일부를 중단한 것과 협의체 구성을 제안한 부분은 긍정적인 신호로 받아들인다"며 "협의체에서 논의할 의제와 협의체 구성 및 운영 방법에 대한 구체적인 안을 신속히 마련해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그러나 서울의대교수 비대위를 제외한 대다수 의료계 인사들은 반응은 냉담했다. 전공의에 이어 의대 교수들마저 병원을 떠났을 때 벌어질 의료대란을 막기 위한 대통령실의 전략적 행보에 지나지 않는다는 해석이다. 정부가 지난 20일 기존보다 총 2000명 늘어난 의대별 입학정원을 공식 발표하면서 27년 만의 의대 증원에 쐐기를 박은 만큼, '2000명 의대 증원 전면 백지화' 의지를 나타내지 않는다면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25일 집단 사직을 결의한 의대 교수 비대위 관계자는 "전공의 면허정지 처분에 대한 효력 정지 가처분 신청이 진행되고 인용될 경우 정부는 명분을 잃게 된다. 전략적으로 대화의 제스처를 보낸 것으로 보여진다"며 "2000명 증원을 철회하지 않고 대화의 장을 만드는 건 무의미하기 때문에 당장은 사직서 제출 결의를 뒤집을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자칫 의대 교수 등 기성 의사들이 어설프게 타협을 추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면 이번 사태의 열쇠를 쥐고 있는 전공의들의 반감이 더욱 거세질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실제 몇몇 전공의들은 의대 교수는 물론 대한의사협회에 대해서도 반감을 드러내고 있다. 2020년 의대증원을 둘러싼 의정갈등이 심화됐을 당시 최대집 의협 회장이 여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정책추진·파업중단에 합의하면서 대한전공의협의회를 포함시키지 않은 데 대한 불만도 컸던 상황이다. 수도권 소재 수련병원 교수는 "이번 사태의 핵심은 전공의다. 또다시 전공의들을 배제한 채 의대 교수들이 정부와 합의하려 든다면 걷잡을 수 없이 갈등이 악화될 것"이라며 "전공의들이 요구한 대로 필수의료 정책 패키지와 2000명 증원 계획을 전면 백지화하지 않는다면 실질적인 접점을 찾긴 어려워 보인다"고 말했다.
대한의사협회도 대통령실의 조치와 관련해 구체적인 입장을 내놓지 않았다. 의협 비상대책위원회는 전일 오후 2시부터 ‘의대 정원 증원 저지를 위한 제5차 비상대책위원회’를 열고 3시간가량 회의를 가졌다. 주수호 의협 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은 회의 직후 기자들과 만났으나 “특별히 언급할만한 결정 사항은 없었다”며 말을 아꼈다. 의협은 현재 차기 회장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를 진행 중이다. 차기 의협 회장 선거가 오는 26일 마무리되는 만큼, 새 회장이 선출된 다음 대정부 대응 기조를 구체화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안경진 의료전문기자 realglasses@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