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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호 "책은 시대의 청년정신…지금은 禁書보다 '책맹'이 더 걱정" [이사람]

■김언호 한길사 대표

'사상계' 들고 책방골목 거닐던 고교생

논객 故함석헌 선생의 글을 등불 삼아

시대에 필요한 책 만들려 49년 '한길'

책 읽게하는 게 나라 역량 일으키는 일

판매금지 등 억압에도 뜻 굽히지 않아

'해방 전후사의 인식' 등 3500여권 출간

나를 설득해야 독자도 설득할 수 있어

저자는 일관성 있는 소신이 가장 중요

최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의 한길사 사옥에서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50년간 출판인으로 살아온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파주=이호재 기자최근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의 한길사 사옥에서 김언호 한길사 대표가 50년간 출판인으로 살아온 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파주=이호재 기자






최근 찾은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의 한길사 사옥. 3층에서 다락방으로 가는 계단을 올라가니 광활한 책의 공간이 나왔다. ‘책을 읽는 창고’를 뜻하는 ‘독고(讀庫)’라는 이름이 붙은 소박한 집무실은 우리나라 대표 인문 출판사 한길사의 산 역사다.



수북하게 쌓인 책들은 마치 나이테가 남긴 무늬처럼 배치 하나에도 시간의 무게가 느껴졌다. 책상 중간에도 A3 크기의 원고지 둘 곳만 남긴 채 양쪽에 높이 쌓인 거대한 탑 같은 책과 문서들 틈에서 뿔테 안경 사이로 형형한 눈동자와 마주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쓴 일기들을 엮는 회고록 작업에 한창인 김언호 한길사 창립자 겸 사장의 오른손 옆에는 빛바랜 채 책등이 허물어진 1961년 출판된 월간 시사 잡지 ‘사상계’ 7월호가 놓여 있었다.

60년 넘은 ‘사상계’를 여전히 지척에 두고 애지중지하는 데는 출판인으로서의 ‘첫 마음’ 때문이다. 1960년대 초 당시 지성인들을 위한 시사 잡지인 사상계를 품에 끼고 부산의 책방 골목을 걷던 고등학생은 대표 논객이자 사상가인 고(故) 함석헌 선생의 글을 등불로 삼았다.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는 글들을 붙잡고 사전을 찾고 밑줄을 쳐가면서 통독했다.

대학생이 된 1965년 서울 효창구장에서 열린 집회에서 굴욕적인 한일회담에 대한 반대 연설을 하는 함 선생을 먼발치에서 바라봤다. 기자로 일하다 1974년 동아일보 기자 해직 사태를 계기로 언론계를 떠나 한길사를 세운 뒤 바로 찾아간 곳 역시 서울 쌍문동에 있던 함 선생 댁이었다. 1982년부터 작업에 나서 1988년 20권으로 출판한 ‘함석헌 전집’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함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담은 책을 70권 이상 만들었다.

“내가 읽고 싶은 책, 내가 공부하고 싶은 주제들,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책을 만들고자 했어요. 나를 설득해야 다른 독자들도 설득할 수 있는 것 아니겠어요. 무엇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책을 만들려고 애를 썼던 시간이죠.”

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집무실 ‘독고’의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는 ‘사상계’ 1961년 7월호가 놓여 있다. 파주=정혜진 기자김언호 한길사 대표의 집무실 ‘독고’의 가장 눈에 띄는 자리에는 ‘사상계’ 1961년 7월호가 놓여 있다. 파주=정혜진 기자


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있는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집무실 ‘독고’ 한쪽에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 ‘들사람얼’을 김 대표가 직접 쓴 글씨가 놓여 있다. 파주=정혜진 기자경기도 파주출판도시에 있는 한길사 김언호 대표의 집무실 ‘독고’ 한쪽에는 함석헌 선생의 말씀 ‘들사람얼’을 김 대표가 직접 쓴 글씨가 놓여 있다. 파주=정혜진 기자


VC처럼 10년 호흡으로 책 만들어

올해로 49년째 한길사를 운영하고 있는 김 대표는 50년 가까운 출판인의 삶을 이같이 담백하게 요약했다. 우리나라 출판계의 백과사전을 만든다면 그는 별도의 챕터를 할애해 소개해야 하는 인물이다. 그의 손을 거쳐 빛을 본 책들은 근현대사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1989년 완간)’, 대하소설 ‘혼불(1996년 완간)’, 이이화의 ‘한국사 이야기(2004년 완간)’, ‘로마인 이야기(2006년 완간)’ 등 3500여 권에 달한다. 그의 지적 갈증에 따라 많은 저자들이 발굴됐고 국가 단위의 지식 체계의 빈틈이 채워졌다. 많은 이들의 삶에도 크고 작은 영향을 줬다.

베스트셀러의 공식이 200쪽 내외로 꼽힐 정도로 책의 호흡이 짧아진 요즘 출판계에는 ‘완간(完刊)’이라는 말은 낯설다. 하지만 그에게 책 만드는 호흡은 최소 10년 단위를 의미한다. 벤처투자자(VC)가 초기 투자금인 시드머니로 일종의 씨앗을 뿌리고 스타트업이 성장할 때까지 최소 7~10년간 물심양면으로 지원하는 것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역사학계에 있어 근현대사의 바이블로 꼽히는 ‘해방 전후사의 인식’도 그렇게 빛을 봤다. 우리 역사 서술에서 해방 전후 시점부터 커다란 구멍이 있다고 생각해 이 시기의 역사를 재정립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했다. 1979년부터 10년간 6권의 책을 내는 작업은 환영받지 못하는 일이기도 했고 당시로서는 ‘금서’가 될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역사학자 겸 언론인인 고 송건호 씨가 쓴 1권은 1979년 10월 15일 출간됐다. 같은 달 26일 고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책은 군부에 의해 바로 판매 금지를 당했다. 당시 문화공보부(현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책을 몰수했다. “판금을 해야 하니 남은 책을 모두 가져오라고 하더라고요. 초판을 5000권 찍었는데 열하루 만에 책이 90%가 넘게 팔렸더라고요. 450권만 남아서 그걸 용달차로 갖다줬습니다. 당시 우리 사회에 제대로 된 근현대사 책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많았는지 보여주는 일이죠.”



김 대표의 일거수일투족은 당국에서도 주목의 대상이 됐다. 위험을 무릅쓰면서도 출판을 결심하는 책은 두 가지 기준이 있었다. 첫째는 ‘우리 민족 고유의 역사와 전통을 책으로 담아낼 수 있는가’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 말과 글을 아름답게 다듬어내는 데 일조하는 일인가’다. 두 가지 질문을 던졌을 때 ‘예스(yes)’라는 답이 나오면 시간이 걸리고 위험이 있더라도 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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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단위의 지식 체계 정비한 민간 출판사

보통 국가 단위 사업으로 진행할 만한 일도 ‘민간’ 출판사가 과감히 벌였다. 1986년부터 기획해 8년간 한꺼번에 펴내는 27권 분량의 ‘한국사’는 170명의 필자가 동원됐다. 당시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낸 한국사는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역사가 뚝 끊긴 것처럼 자세히 다뤄지지 않았기에 이 부분을 대폭 보완했다. 그는 “작은 출판사에서 거의 불가능한 작업이지만 무모하다고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결정해서 구현해냈다”고 말했다.

380만 부가 팔린 대하소설 ‘혼불’도 한 일간지의 장편소설 공모전에서 당선된 뒤 한 권 분량으로 끝날 뻔했던 소설이었다. 1983년 최명희 작가의 소설을 읽고 흥분한 그는 “이 소설은 계속 써야 하는 소설”이라며 작가를 만날 때마다 설득해 결국 원고지 1만 2000장 분량의 10권짜리 전집으로 재탄생했다. 완간될 때까지 연재처를 물색하고 집필을 독려하면서 13년을 함께 매달린 이 작품은 우리 전통적 삶의 원형을 복원한 책이자 우리말의 아름다움의 정수를 선보인 소설로 평가받는다. ‘혼불’에 모든 연료를 투입한 최 작가는 완간 후 채 2년이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당시 이탈리아 출장을 다녀오면서 비싼 만년필을 선물했더니 ‘후속편은 이것으로 쓰겠다’며 웃던 모습이 여전히 선해요. 살아 있었다면 우리나라 문학이 한 차원 달라졌겠죠.”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 역시 15권을 1년에 한 권씩 써내는 ‘브레이크 없는 작업’이었다. 국내 판권을 계약한다고 할 때도 주변에서는 백이면 백 반대했다. 하지만 저자의 필력을 봤을 때 느낌이 왔다. 그는 “로마인 이야기는 역사관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재미있게 읽힌 작품”이라며 “로마제국의 이야기가 당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전략과 시사점을 주는 게 있었다”고 말했다. 로마인 이야기는 지금까지 400만 권 가까이 팔리며 다른 ‘무모한 도전’들을 가능하게 했다.

저자를 발굴할 때도 가장 눈여겨보는 점은 ‘일관성’이다. 그는 “자신의 소신을 일관성 있게 가져가는 사람이 저자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며 “사상이나 이념보다 자신의 이론과 신념을 일관성 있게 관철해나가는 사람을 존중한다. 어떤 날은 이렇게, 어떤 날은 저렇게 바뀌는 사람은 긴 호흡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갈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200쪽 내외의 분량이 흥행 공식으로 자리 잡은 요새 출판계에서 한길사는 언뜻 외길을 걷는 듯 보인다.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을 집대성하겠다는 포부로 1996년 시작한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는 186권까지 출간됐다.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루소의 ‘에밀’ 등 필수 고전들이 이 시리즈를 통해 독자들을 만났다. 그는 “한길그레이트북스는 전국 도서관에서 1000권만 구입해 배치한다고 해도 계속 만들 수 있는 상황”이라며 “현재는 전국 도서관에서 발주하는 물량이 300권에 불과하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공공의 지식이 될 수 있는 인문·사회 서적에 대해서는 베스트셀러와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는 설명이다.

/파주=정혜진기자/파주=정혜진기자


AI 시대 엔지니어 못지않게 편집자 키워내야

그는 요즘 가장 큰 걱정거리로 ‘큰 책’을 읽어내지 못하는 풍토를 꼽았다. 김 대표는 “전 국민 중에 글자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책을 읽어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며 “‘문맹’이 아니라 ‘책맹’을 걱정해야 하는 시대”라고 우려를 나타냈다. 그에게 책을 읽게 하는 것은 나라의 역량을 일으키는 일의 하나다. 특히 인공지능(AI) 시대에 많은 이들이 AI에 정보의 생산과 편집을 의존하고 있지만 AI가 제공하는 정보 속에서 맞는 정보를 찾아내 검증하고 하나의 결론을 향해 가는 완성도 있는 책을 만드는 편집자의 역량은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김 대표는 “이대로라면 본격적인 학술 저서를 누가 만들 수 있느냐는 게 의문”이라며 “우리 사회에 어떤 과학·기술 책이 필요한지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편집자의 수준이 높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시대마다 요구하는 책이 있고 좋은 책을 만드는 사회가 좋은 기술을 바탕으로 좋은 기계도 만들고 좋은 물건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보다 과감하게 출판업종 같은 경우는 편집자의 월급을 출판사에서 내는 만큼 국가에서도 매칭하는 등 인재들이 출판업으로 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책을 만들어온 정신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사상가 리영희 선생이 써준 한길사의 휘호 ‘청년한길’을 보여줬다. “한 권의 책은 청년 정신입니다. 청년 정신으로 50년 가까이 책을 만들었어요.”

He is… △1945년 밀양 △중앙대 신문학과 △서울대 언론정보대학원 △1968년 동아일보 입사 △1976년 한길사 창립 △1997년 헤이리 이사회 이사장 △1998년 한국출판인회의 창립(1~2대 회장) △2005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2008년 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제2기 회장 △2011년 파주 북소리 조직위원장 △2013년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


파주=정혜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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