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서트 오브 유럽(Concert of Europe)’은 19세기 초 나폴레옹 전쟁 이후 유럽의 강대국들이 대륙의 질서를 관리하기 위해 구축한 협조 체제였다. 강대국들은 서로의 영향권을 인정하면서 핵심 이익을 침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일정한 ‘세력권 분할’의 원칙을 유지했다. 어느 한 국가가 지나치게 강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힘의 균형(balance of power)’을 중시했고, 위기가 발생하면 강대국들이 공동으로 대응하는 ‘집단 안보(collective security)’적 조율도 시도됐다. 최근에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와 유사한 강대국 간 타협과 협조의 국제질서를 추진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실제로 최근 공개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NSS)에서는 1기 NSS에서 강조됐던 ‘강대국 경쟁’ 프레임이 사라지고, 대신 강대국 간 조정과 협상을 염두에 둔 표현들이 등장한다. 중국과의 경쟁을 완화하고 공존을 모색하려는 트럼프의 ‘거래적 본능’도 엿보인다. “함께 이익을 낼 수 있다면 전략 경쟁은 접어둘 수 있다”라는 것이 NSS가 제시한 ‘유연한 현실주의(Flexible Realism)’의 핵심이다. 이는 중국의 굴기를 되돌리기 어렵다는 비즈니스맨 특유의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결과일 수 있다.
흥미로운 점은 NSS가 대중 타협 기조와는 별도로 중국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 인도·태평양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서태평양 ‘제1도련선’을 지켜내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이번 NSS에는 ‘경제적 타협’과 ‘군사적 억지’의 메시지가 뒤섞여 있는데, 이는 트럼프 행정부 내부의 견해 차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행정부 안에는 중국을 ‘체제 도전 세력’으로 규정하고 압박을 강화해야 한다는 이념적 강경파와 시진핑 주석과의 담판을 통해 실익을 얻으려는 타협론자가 공존하고 있다. 결국 이번 NSS는 중국에 대한 시각 차이가 조화를 이루지 못한 채 억지로 봉합된 결과물에 가깝다.
트럼프가 2026년 방중을 계기로 중국과 경제·기술 현안은 물론 핵통제 같은 안보 이슈까지 포괄하는 ‘그랜드 바겐’을 추진하고 있다는 분석은 이미 여러 차례 제기됐다. 그러나 미국과 대등한 핵능력을 확보하려는 중국의 전략적 목표를 감안하면 중국이 미·중 핵통제 협의에 응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트럼프가 중국과 콘서트식 국제정치를 구현하려 한다면 인도태평양에서 중국의 세력권을 일정 부분 인정해야 하는데, 남중국해는 몰라도 미국이 대만을 포기하는 시나리오는 상상하기 어렵다. 대만을 세력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면 중국이 트럼프의 ‘세력권 분할’에 동의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트럼프는 대만을 첨단기술 공급망 등 ‘경제 안보(economic security)’의 관점에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지만 이 시각을 행정부 전체가 공유하는 것은 아니다. 최근 트럼프 행정부는 대만에 역대 최대 규모인 약 16조 원(약 110억 달러) 규모의 무기 판매를 승인하고 이를 의회에 통보했다.
트럼프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통처럼 서반구에서 미국의 독점적 세력권을 인정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받아들일 의사가 별로 없어 보인다. 최근 중국은 중남미·카리브해 국가들과 ‘운명공동체’ 구상을 발표하며 영향력 확대 의지를 분명히 했고, 트럼프가 축출하려는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도 여전히 뒤를 봐주고 있다. 중국은 아시아·아프리카·중남미뿐 아니라 극지(極地)와 우주·심해에서도 우위를 확보하려 하고 있다.
트럼프식 타협은 미국에는 현실적 선택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국제정치학의 대가 존 미어샤이머의 현실주의 이론에 따르면 부상하는 패권국은 기존 패권국을 대체해 지구적 패권을 추구하고, 기존 패권국 역시 그 지위를 지키기 위해 큰 대가를 치른다.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는 것이 안보를 확보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강대국 경쟁의 전선이 확장되는 것은 국제정치 구조가 만들어 내는 불가피한 현실이다.
2026년 미·중 대타협은 성사되기 어려워 보이며 설령 성사된다 해도 오래 지속되기는 쉽지 않다. 미어샤이머는 이러한 구조적 갈등을 ‘강대국 정치의 비극(Tragedy of Great Power Politics)’이라 불렀다. 유럽의 콘서트 체제가 가능했던 것도 강대국들이 대규모 전쟁을 치른 뒤에야 세력권 분할의 질서에 합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중 관계는 잠시 숨 고르기에 들어간 것일 뿐 구조적 경쟁은 계속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