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와 사람에 취하는 여자

향수ㆍ와인 애호가 김영선 이지함화장품 사장의 특별한 향기 철학

김영선 이지함화장품 사장은 향수 수집을 좋아한다. 200여 종 이상 향수를 모았다는 그녀는 어느 자리에서나 잘 어울리는 향긋한 와인을 골라내는 데도 재주가 있다. 하지만 자사가 만드는 제품에선 향기를 조금이라도 더 빼기 위해 노력한다. 김영선 사장의 향기 철학을 알아봤다.

한정연 기자 jayhan@hmgp.co.kr
Photograph by LEE JONG CHUL

오랜만이라며 내미는 손에 서 은은한 향기가 났다. 첫 향기는 분명 강하지 않았는데 마주하고 앉으니 달콤 한 냄새가 진하게 다가온다. 지난해 말 있었던 모임에서 그가 권했던 와인과 느낌이 비슷했다. 잔에 따를 때는 여러 가지 향이 단단하게 얽혀 있었지만 한 모금 넘기자 과일 향과 훈제 향 같은 것들이 입안 가득 퍼졌던 와인 이다. 대뜸 오늘 무슨 향수를 뿌렸냐고 물었다.

"오늘 아침 베트남 출장에서 돌아왔습니다. 면세점에 서 산 샤넬의 '샹스' 라는 향수예요. 원래는 오렌지색 용 기에 들어 있었는데, 여름용으로 연두색 신제품이 나왔 던데요. 여성적인 느낌을 유지하면서도 느낌은 훨씬 가 벼워졌네요."

기능성 화장품인 코스메슈티컬*을 국내에 소개한 김영선(43) 이지함화장품 사장을 6월 8일 오후 강남구 신사동 집무실에서 만났다. 김 사장은 기능성 화장품 분야에서 선두주자로 이름이 높지만, 내로라하는 향수 애호가들이 많은 화장품업계에서 '향기에 대한 안목이 뛰어난 CEO' 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가 이렇게 향수나 와인 선구안이 높은 데 는 선천적인 이유가 있다. 김 사장은 어릴 때부 터 후각이 유달리 발달해 취향에 맞지 않는 냄 새를 참지 못했다. 삼겹살이나 갈비처럼 불에 직접 구워먹는 음식은 지금도 피한다. 채식주의 자라서가 아니다. 옷에 배어 있는 탄내를 견디 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가 향수를 200여 종 이 상 모으게 된 것도 실은 이런 냄새를 막기 위 해 서였다.

화장품업체 CEO로서 향에 대해 특별한 감 각을 지녔다는 점은 분명 강점이다. 하지만 김영 선 사장은 이를 철저하게 취미로만 한정시킨다. 이지함화장품 제품 가운데 인공적인 향이 강한 제품은 하나도 없다. 일반적으로 강한 향을 많 이 쓰는 남성용 화장품에도 날 듯 말 듯 미세한 허브 향만을 쓴다.

김 사장은 향수를 패션에 비유했다. 그는 "우 리 제품은 베이직한 속옷과 같다" 며 "몸에 직접 닿는 속옷이 편하고 피부에 해를 끼치지 않아 야 화려한 겉옷도 더 사는 것" 이라고 설명했다.

겉옷으로 멋을 내듯 화장품으론 피부를 보 호하고 향수로 멋을 내라는 충고다. 향을 좋아 하는 그에게 자사 제품에서 향을 빼야 하는 게 힘들진 않았을까?

"인공적인 향도 하나의 화학 성분입니다. 피 부 건강을 지키기 위해 11년 전 만들기 시작한 우리 제품에 향을 넣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화 장품에 꼭 필요한 화학 성분에서 나는 냄새를 없애줄 만큼만 향을 추가하고 있습니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향수가 무엇인지 물었 다. 난감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향은 계절과 기후에 따라 달리 선택해야 한다는 답이 돌아 왔다. 때와 장소에 따라서도 다르다고 그녀는 덧붙인다.

지금처럼 더울 땐 무겁고 진한 향을 피해야 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향수는 자신이 좋아 서 사용하는 '자신의 취향' 이지만 동시에 주변 사람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는 '타인의 취향' 이 기도 하다는 것. 그는 이번 베트남 출장 중에는 캘빈클라인의 '뷰티' 라는 제품을 자주 썼다. 향 이 진하지 않고 무거운 느낌이 없어 무더운 날 씨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란다.

그는 가장 좋아하는 시슬리의 '오 뒤 수아르' 라는 제품은 특별한 날에만 쓴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은은하게 퍼지는 이 향수는 비 오는 날이 제격이기 때문이다.

남성 CEO들과 골프 칠 일이 많은 그에게 운동할 때 좋은 남자 향수를 추천해달라고 했 다. 김 사장은 "땀 냄새를 지울 수 있을 만큼만 사용하는 게 어떤 제품을 쓰는지보다 더 중요 하다" 며 "골프가 끝나고 식사를 하는 일이 많 으니 미리 옷 끝단에 향수를 뿌려 놓으면 좋다" 고 충고했다.

김영선 사장이 자주 쓰는 향수는 여성적인 느낌의 가벼운 제품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그답 게 혹시 모를 '타인의 취향' 을 고려하기 때문이 다. 향수도 브랜드마다 캐릭터가 확실한 편이라 클로에의 향수는 가리지 않고 좋아하는 편이다. 이처럼 가볍고 은은한 제품으로는 에르메스의 '메르베이' 나 불가리의 '자스민 누아르' 가 있다.

김 사장은 와인에도 일가견이 있다. 와인의 향은 부케 Bouquet라고 불린다. 이를 전문적으로 감별하는 직업도 있다. 와인을 좌우하는 요소 가운데 절반은 향이라고 볼 수 있다. 김 사장은 "와인을 마실 때 첫째로 느끼는 경험이 향" 이라 며 "좋은 와인일수록 향이 복합적이고 은은하 게 오래간다" 고 설명했다. 와인의 향을 결정짓 는 것은 포도 품종. 그가 좋아하는 건 피노누아 품종이다. 은은한 향이 가볍게 깔리면서도 오래 가는 게 특징이다.

김 사장이 와인을 좋아하게 된 건 사람들과 만나는 것을 즐기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연구소 등 공적인 기관에서 하는 CEO 모임 2곳에 빠 지지 않고 나가고 있다. 친분 있는 CEO들끼리 정기적으로 갖는 식사 모임에도 자주 참석한다. 가끔은 도움이 될법한 분야의 CEO 사이에 다 리를 놓기도 한다. 이런 자리에서 그가 특히 신 경 써 고르는 게 와인이다. 와인도 꼭 연인처럼 '개인의 취향' 과 '타인의 취향' 사이에서 균형을 잘 잡아야 한다.

"사업차 만나는 자리에는 프랑스 와인처럼 독특한 건 가져가기 힘들죠. 그래서 미국이나 이태리 와인처럼 모나지 않은 와인을 주로 들고 갑니다. 가격대도 중요하죠. 저는 10만 원대 와 인을 선호해요. 이 가격대에서 50만 원대 이상 의 향을 지닌 보물을 발견하는 맛도 있고요."

그의 집무실 한쪽에는 와인 냉장고가 놓여 있다. 갑작스럽게 잡히는 자리도 많은데 그때 마다 모임의 성격과 참석자 면면을 보고 와인 을 가져가기 위해서다. 그는 기자와 만난 날에 도 저녁모임 일정이 있었다. 무엇을 가져갈 건 지 물어봤다.

"오늘 모임은 제가 아는 여성 CEO를 다른 분들께 소개하는 자리예요. 두 분은 술을 잘 못 하고, 다른 분은 와인을 무척 즐기세요. 모나지 않은 이태리 와인 중에서 무겁지 않은 2001년산 라스피노나의 바르바 레스코를 준비했습니다."

김영선 사장과 몇 차례 술자리를 가졌지만 기자는 한 번도 그가 취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술이 아닌 향에 취하고 사람에 취한다.

*코스메슈티컬: 코스메틱(Cosmetics ..화장품)과 파머슈티 컬(Pharmaceutical ..의약품)의 합성어로 의약화장품을 뜻 한다. 주름 개선..피부 미백..자외선 차단 등 기능성을 강조 한 것이 많다. 원래는 피부과 의사들이 자체 개발해 환자 들에게 처방했던 치료약이다. 그러나 1999년 의약분업 으로 병원에서 약을 팔 수 없게 되자 그 이듬해부터 기능성 화장품으로 개발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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