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이 사랑한 시계 바쉐론 콘스탄틴

시계 브랜드 이야기 ①

바쉐론 콘스탄틴은 올해로 탄생 258주년을 맞았다. 창립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세계 여러 나라에서 사랑 받아온 이 시계 브랜드는 그 역사만큼이나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을 많이 갖고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특별한 브랜드 스토리 몇 가지를 소개한다.
김강현 기자 seta1857@hmgp.co.kr


2010년 3월 10일. 미술품 전문 경매회사 K옥션이 오래된 회중시계 한 점을 메이저 경매에 올려 화제가 됐다. 시작가 5,000만 원이었던 이 회중시계는 1억2,500만 원에 이름이 공개되지 않은 한 개인에게 최종 낙찰됐다.

이 경매가 세간의 주목을 받았던 까닭은 회중시계의 첫 주인이 순종이었기 때문이다. 순종의 국장 과정과 부장품, 장례에 쓰인 도구 등을 찍은 사진첩 ‘어장의사진첩御葬儀寫眞帖’ 기록이 이를 증명한다. 시계 뒷면에 새겨진 이화문 모양은 대한제국의 황실을 상징한다.

당시 경매로 또 한 번 주목받은 시계 브랜드가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이다. 회중시계 정면에 새겨진 브랜드명과 시계 뒤편 뚜껑 안에 새겨진 장인 이름이 고고한 바쉐론 콘스탄틴의 브랜드 이미지에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됐다. ‘대한제국 황실이 사용하던 시계 브랜드’로 유명세를 탄 셈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우리나라와 인연을 맺은 건 1800년대 말 개화기 때부터다. 이때는 우리나라가 서양의 여러 나라와 외교 접촉을 시작하던 때로, 당시 가장 많이 들여온 외래 문물 중 하나가 시계였다. 당시에는 손목시계가 일반화되기 전이어서 모두 회중시계를 가지고 들어왔다.

이 시기 황실과 고위 관리들 사이에서는 시계를 가지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특히 순종의 시계 사랑이 유별났다. 순종이 거처하던 창덕궁에는 많은 시계가 있었는데 순종은 이 시계들이 정시에 맞춰 종을 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순종은 덕수궁에서 지내던 고종에게 문안 전화를 할 때에도 매번 시간을 물어봤다. 순종의 하루 일과 중 하나는 고종의 시계와 창덕궁 시계 시간을 맞추는 것이었다.

바쉐론 콘스탄틴 역사의 출발점은 175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민한 시계 제조업자 장-마크 바쉐론Jean-Marc Vacheron(1731~1805)이 스위스 제네바의 심장부 릴 지역에 워크숍을 연 것이 그 시초였다.

바쉐론은 손꼽히는 시계장인이었다. 그가 제작한 시계들은 국경을 넘어 명성을 떨쳤다. 두 아들 아브라함 Abraham과 자크-바텔레미 Jaques-Barthe´lemy가 대를 이어 그의 워크숍을 이어받았고, 1819년에는 유능한 사업가 프랑수아 콘스탄틴 Franaois Constantin(1788~1854)이 합류하면서 현재의 브랜드명 ‘바쉐론 콘스탄틴’이 탄생했다.

이 시기에 중국에선 바쉐론 콘스탄틴의 인지도가 상당했다. 당시 바쉐론 콘스탄틴이 중국에서 높은 인지도를 갖게 된 데에는 1819년 합류한 프랑수아 콘스탄틴의 역할이 컸다.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중국에 수출할 시계 상품을 개발하는 데 보냈다.

당시 중국인들의 독특한 취향을 만족시킬 여러 모델들이 나왔는데 이들 시계에는 ‘황제 스타일’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주로 황제를 위한 시계였기 때문이다. 이들 시계에는 화려한 에나멜 장식이 가미되거나, 귀족들이 선호하는 보석인 진주가 외관을 수놓는 경우가 많았다. 이 같은 스타일은 중국인들에게 큰 인기를 얻어 당시 중국이 유럽 시계 브랜드들의 주요 수입원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상징인 말테 크로스Malte Cross는 1880년에 상표등록이 됐다. 이 십자가 모양의 형태는 처음엔 배럴을 보호하는 덮개로 디자인됐다. 이후 말테 크로스가 바쉐론 콘스탄틴을 연상시키는 상징적 표식이 되면서 차츰 다이얼 패턴이나 스트랩, 버클 등으로 쓰임이 확대됐다.

같은 시기, 중동지역에선 마니아층이 생길 정도로 바쉐론 콘스탄틴의 인기가 높았다. 특히 유명한 이들로는 이집트 왕 푸아드 Fuad(1868~1936)와 그의 차남이자 이집트의 마지막 왕인 파루크Farouk(1920~1965)가 있다.

극성 수집가였던 파루크 왕과 바쉐론 콘스탄틴 사이에는 재미있는 일화도 있다. 1937년, 청년이었던 파루크는 왕자 신분으로 스위스 제네바를 방문하게 된다. 이때 그는 바쉐론 콘스탄틴사를 몹시 가보고 싶어 했다. 이 소식을 들은 바쉐론 콘스탄틴사는 그를 직접 작업장에 초대하게 됐는데, 당시 어린 나이였음에도 불구하고 파루크가 시계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어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파루크는 수없이 많은 고가 시계들을 분해해 봤기 때문에 작업장에서 해박한 지식을 뽐낼 수 있었다. 후에 제네바시는 파루크를 위해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만든 시계를 선물했는데 그 시계에는 다이얼 바늘만 13개가 달려 있었다. ‘파루크가 분해하지 못하도록 일부러 복잡하게 설계했다’고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1900년대 중반 이후 바쉐론 콘스탄틴의 명성은 더욱 빛을 발하게 된다. 1970년 오일쇼크 때 다소 시련을 겪기도 했고, 쿼츠 무브먼트의 등장으로 1980년대 침체기를 맞기도 했지만, 바쉐론 콘스탄틴만의 기술력과 예술성으로 어려운 시기를 극복했다. 1996년 경영 전문화를 위해 리치몬트 그룹에 인수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바쉐론 콘스탄틴은 1755년 첫 론칭 때부터 현재까지 스위스 제네바 릴 지역에 본사를 두고 있다. 이 지역 자체가 바쉐론 콘스탄틴의 브랜드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1906년 같은 지역 케드릴 구역에 처음 문을 연 부티크 역시 같은 장소에서 현재까지 충실히 역할을 수행 중이다. 부티크 2층에는 헤리티지 갤러리가 있어 과거의 시계 제조 도구나 바쉐론 콘스탄틴의 옛 시계 모델들을 감상할 수 있다.

비교적 최근인 2004년, 바쉐론 콘스탄틴은 작업 환경 개선 등을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서 남서쪽으로 4마일 정도 떨어진 플랑 레 조테Plan Les Ouate 지역에 새로운 매뉴팩처를 설립했다. 이 새로운 건물의 미래지향적 외관과 현대적 내부시설에도 불구하고 바쉐론 콘스탄틴은 여전히 수공으로 시계를 제작하고 있다. 시계 공정에 대한 바쉐론 콘스탄틴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바쉐론 콘스탄틴이 260년 가까이 시계 브랜드 최고봉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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