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6월 13일 미국 미주리주 캔자스시티의 리서치 메디컬 센터에서 키라 워커가 태어났다. 당시 의사들은 그녀에게 건강상의 문제가 있을 것이라 여겼다. 그녀의 어머니가 헤로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임신기간 중 ‘메타돈’이라는 약물을 복용했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키라를 신생아 중환자실(NICU)에 입원시키고 금단증상이 나타나는지 면밀히 관찰했다. 그 결과, 금단증상은 아니지만 그만큼 위험한 비정상적 혈당 저하 증세를 발견했다. 다행히 초기 치료는 성공적이었다.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을 투여해 혈당을 제어했고, 키라는 퇴원했다. 그러나 1개월 후 재검진에서 그녀의 혈당은 혈당측정기가 읽지 못할 정도로 낮아져 있었다.
결국 키라는 칠드런스 머시병원에 재입원했고, 원인 규명을 위한 온갖 검사를 받았다. 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매일 혈당이 널뛰기하듯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뇌손상 일보직전까지 갔음에도 손 쓸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키라가 칠드런스 머시병원에 입원한 것은 정말 행운이었다. 이곳은 신생아의 게놈 서열을 단 며칠 만에 분석해낼 수 있는 미국 내 극소수의 병원 중 하나다. 의사들은 키라와 부모의 혈액샘플을 채취해 게놈 서열 분석을 실시했고, 3일 만에 결과가 나왔다.
그렇게 키라가 아버지로부터 돌연변이 ABCC8 유전자를 물려받았으며, 췌장 세포의 일부에서 무작위적 돌연변이가 일어났음이 확인됐다. 이 돌연변이 췌장 세포들이 혈당을 떨어뜨리는 인슐린 호르몬을 지속적으로 분비했던 것이다.
키라의 췌장 세포 중 약 60%가 정상이었기에 의사들은 병든 췌장을 절제하면 당뇨병에 걸리는 부작용 없이도 치료가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이후 키라는 이 분야의 전문가들이 있는 필라델피아 아동병원으로 옮겨 생후 2개월이 된 8월 30일 수술대에 올랐고, 3시간의 수술 끝에 완치됐다.
칠드런스 머시 병원 소아 게놈 의료센터의 스티븐 킹스모어 센터장에 따르면 소아의 게놈을 분석하면 질환 유발 가능성이 있는 모든 유전적 원인을 파악할 수 있다. 그것도 불과 50시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현재 칠드런스 머시 병원에서는 미국 내 NICU 입원 신생아 중 3분의 1이 유전병에 걸린 환아로 추정한다. 그럼에도 키라처럼 단일 유전자 돌연변이에 의한 유전병은 일반적 검사로는 진단이 극히 어렵다. 지금껏 밝혀진 것만 4,000종이 넘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게놈 서열 분석 결과가 나오려면 4~6주일을 기다려야하는 게 다반사인데 상당수의 환아들은 이 기간을 견디지 못한다.
이에 킹스모어 박사팀은 지난 몇 년간 키라를 포함해 유아 36명의 게놈 서열을 분석하는 파일럿 프로젝트를 수행했다. 최근에는 미국립보건원(NIH)의 자금을 지원받아 1,000명 이상의 유아를 대상으로 한 게놈 서열 분석 임상시험에 착수했다. 다른 기관 3곳에서도 금명간 임상시험이 실시될 예정이다.
전문가들은 이 같은 노력에 의해 신생아 게놈 분석의 빛과 그림자가 한층 명확해질 것이며, 이는 다시 신생아 의료시스템의 혁신을 이끌 것이라고 내다본다. 하지만 그 효용성과는 별도로 이 기술들은 누구도 쉽게 대답키 어려운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신생아와 태아의 인권, 유전자 차별 가능성, 그리고 이 기술이 유전자 조작으로까지 이어졌을 때 기술 활용의 한계선을 어디로 정할지 등이 그것이다.
혹자는 유전병 예방을 위해 감내해야할 부작용이라 말할지 모르지만 유전자 조작을 거쳐 아름다운 외모와 우월한 유전자를 지닌 이른바 ‘맞춤형 슈퍼베이비’들이 탄생할 경우 사회적 혼란은 물론 인간의 존엄성마저 위협받을지도 모른다.
2003년 4월 30억 달러에 육박하는 자금과 13년에 걸친 연구 끝에 ‘인간 게놈 프로젝트(HGP)’에 의해 30억개에 달하는 인간 게놈 염기서열이 모두 밝혀졌다. 의학계는 이 성과로 하루아침에 의학계가 바뀔 것으로 기대했다. 인간의 모든 유전자 코드가 밝혀지면 대다수 질병의 원인이 규명되고, 치료법도 알아낼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던 것.
칠드런스 머시 병원의 신생아 학자인 조시 페트리킨은 이렇게 밝혔다.
“사람들은 마치 ‘스타 트렉’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같은 혁신적 의료 시대가 열릴 거라고 생각했죠.”
물론 그런 일은 없었다. 왜냐고? 일단 게놈 서열 분석, 다른 말로 하자면 눈에 보이지도 않은 작은 문자 30억개의 정확한 순서를 밝히는 작업은 엄청난 시간과 돈이 들어간다. 그 결과를 유용하게 해석하기도 매우 힘들다. 마치 화성인의 언어로 적힌 책을 해석하는 일과도 같다. 게놈은 화성인의 언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혀 모르는 언어이고, 문법 또한 극히 까다롭고 예외 규칙도 많은 탓이다.
설상가상으로, 과학자들은 최근 많은 질병이 단일 유전자 돌연변이로 생기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여러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복합 작용한 결과거나 유전자 돌연변이와는 전혀 상관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쨌든 인간 게놈 서열이 파악된 지 11년이 흐른 지금, 적어도 신생아들에게만큼은 질병 진단과 치료의 혁신이 가능해졌다. 성인들의 질병은 유전적 요인과 환경적 요인이 복잡 다단하게 얽힌 산물인 반면 신생아 사망의 최대 원인은 유전병이다. 그리고 그 유전병의 다수는 단일 유전자 돌연변이가 원인이다. 낭포성 섬유증, 겸상 적혈구 빈혈증, 타이 작스병을 비롯해 전 세계에 환자가 수백명에 불과한 수천 종류의 희귀병들이 여기에 포함된다.
이 희귀병은 워낙 특이해 진단이 매우 어렵지만, 원인이 유전자에 있으므로 이론상 게놈 서열 분석만 이뤄지면 진단에 큰 문제가 없다. 더욱이 지난 10년간 유전자 서열 분석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이 대폭 낮아졌다. 생물정보학 소프트웨어의 성능도 크게 개선돼 기존에 알려진 증상과 질환을 유발하는 유전자 돌연변이의 탐색이 한층 쉬워졌다.
4년 전 뉴멕시코주 산타페 소재 미국 게놈자원센터(NCGR)의 수장이었던 킹스모어 박사는 이러한 기술 진보가 신생아들에게 큰 의학적 혜택이 될 수 있음을 꿰뚫어봤다.
“당시 저희 연구팀은 코코아와 쌀의 게놈 서열 분석을 하고 있었죠.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식물 게놈 서열 분석법을 의학에 적용할 수도 있음을 깨달은 겁니다.”
얼마 뒤 그는 소아 게놈 의료센터를 오픈해주겠다는 칠드런스 머시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일루미나라는 바이오기업이 자사의 최신 고속 게놈 서열 분석기인 ‘하이시크(HiSeq) 2500’의 베타테스트를 실시할 병원을 찾고 있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 기기로 뭘 할 수 있을지 묻더군요. 그래서 이렇게 말해줬죠. ‘그건 저희가 잘 압니다. 이걸로 유전질환에 고통 받는 신생아들을 진단할 수 있어요. 그런 신생아들 대부분이 진단을 받기도 전에 사망하거든요.’”
그렇게 킹스모어 박사팀과 일루미나의 파일럿 프로젝트가 2011년 11월 시작됐고, 원인을 알 수 없었던 환아 36명 중 18명의 진단에 성공했다. 기존 진단법으로는 족히 수개월은 걸려야 해 생명을 담보할 수 없었던 신생아들이었다.
필자는 칠드런스 머시 병원의 소아과장인 하워드 킬브라이드 박사와 페트리킨 박사의 안내를 받아 NICU에 들어갔다. 한쪽에 생후 3개월 된 엘리아나 루이스가 아버지 품에 안겨 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2013년 12월 31일 태어난 그녀는 출생 직후부터 수분마다 한 번씩 뇌 발작을 일으켰다고 한다.
기존 치료법으로 차도가 없자 의사들은 게놈 서열 분석을 실시했다. 그 결과, 엘리아나가 ‘오타하라 증후군’을 앓고 있음이 밝혀졌다. SCN2A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원인으로 저당분·저탄수화물 식이요법으로 치료될 수도 있는 질병이었다. 그렇게 3월부터 식이요법이 시작됐고, 발작은 통제 가능한 수준으로 완화됐다. 진정제나 인공호흡기는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어머니인 미셀 루이스는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그제야 엘리아나가 주변상황에 조금씩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엘리아나를 포함한 게놈 서열 분석의 성과들은 킹스모어 박사조차 놀랄 만한 수준이었다.
“게놈 서열 분석한 신생아들 대부분의 질병을 진단할 수 있었습니다. 연구팀도 이 정도로 효과가 있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아직도 의학계가 인간 게놈에 대해 알지 못하는게 훨씬 많다는 점을 감안하면 더더욱 놀라운 성과에요.”
물론 모든 스토리가 해피엔딩은 아니다. 엘리아나만 해도 현재의 예후는 의학적으로 큰 의미를 갖지 못한다. 오타하라 증후군에 걸린 신생아는 유아기를 무사히 넘기더라도 심각한 지적 장애가 일어나기 십상인 탓이다. 또한 진단에 성공해도 치료법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 페트리킨 박사에 의하면 파일럿 프로젝트에 참여해 질병의 원인을 찾아낸 18명 가운데 치료가 가능했던 신생아는 7명뿐이었다.
“분명 슬픈 일입니다. 하지만 질병의 원인을 찾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습니다. 최소한 가족들에게 현 상황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고, 아이들의 고통을 줄여줄 수도 있으니까요.”
하워드 박사도 그런 생각에 동의했다.
“싸워야 할 상대를 알고 있으니 적절한 후속 조치를 취할 수 있습니다. NIH가 지원하는 임상시험을 통해 더 많은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필자는 NICU의 한 인큐베이터 앞에 멈췄다. 생후 3주된 자비에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이 남자아이는 장(腸)이 몸 밖으로 나온 상태로 태어났다고 한다.
“장을 체내로 넣기 위해 수차례의 수술을 진행했지만 매번 아이의 몸이 거부하고 있어요. 유전자 이상이 아닐 수도 있지만 게놈 서열 분석을 통해 문제의 원인을 찾으려 합니다.”
자비에 옆에는 담요에 꽁꽁 싸인 채 인공호흡기에 의지하고 있는 아이가 있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스스로 숨을 쉬기 힘들어 했다는 이 아이는 폐 고혈압이 진행 중이라고 했다. 진단이 이뤄졌음에도 이곳에 있는 이유는 증세가 동일해도 유전적 원인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환자에게 똑같은 치료를 하기보다는 개인별 맞춤형 치료가 가장 이상적입니다. 게놈 서열 분석을 거쳐 최적의 치료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겁니다. 향후 혈액검사만으로 며칠 만에 개인 맞춤형 진단이 나온다면 의료계에 혁명적 발전이 이뤄질 수 있습니다.”
알렉시스 스터전의 오빠는 15세 때 계속 구토를 했다. 처음에는 단순한 감기라 여겼지만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다. 그래서 여러 병원을 전전한 끝에 후천적 ‘오르니틴 카르바밀전달효소(OTC)’ 결핍증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OTC 유전자의 돌연변이로 생기는 희귀병이다.
정상적 OTC는 체내 질소를 처리하는 단백질을 생산하는데 돌연변이에 의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체내에 유독성 암모니아가 쌓인다. 그래서 스터전의 오빠는 질소 처리 단백질의 보충을 위해 약을 먹어야했다. 하루에 100알이나 먹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OTC 유전자는 X염색체에 위치해 있다. 남성은 X와 Y염색체를 하나씩 지니고 있어 OTC 유전자 돌연변이를 물려받을 경우 OTC 결핍증에 걸린다. 반면 여성은 X염색체가 2개여서 부모로부터 돌연변이 OTC 유전자가 전이돼도 증상이 나타나지 않는 무증상 보균자로 남을 수 있다. 나머지 1개의 X염색체에 들어 있는 정상 OTC 유전자가 건강을 유지하기에 충분한 질소 처리 단백질을 생성하는 덕분이다.
알렉시스는 건강에 이상이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OTC 유전자 검사를 해봤고, 무증상 보균자로 판명 났다. 그러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미래에 낳게 될 자녀가 아들이면 자신의 돌연변이 유전자로 인해 OTC 결핍증에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딸이어도 무증상 보균자가 될 확률이 50%여서 자신과 동일한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미국 뉴저지주 소재 착상전 유전자 진단(PGD) 전문기업 리프로제네틱스의 공동설립자인 산티아고 무네 박사는 이 문제의 해결에 평생을 바친 유전학자다. 그는 1990년대 초반 유전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면서 임신을 원하는 여성이야말로 유전학 기술 발전의 혜택을 가장 크게 받을 대상이라고 판단했다.
“당시 알렉시스 같은 여성에게 의사들이 해줄 수 있는 말은 기껏해야 운에 맡겨야 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대안을 찾고자 노력한 그는 1993년 미국 코넬 의대의 자크 코헨 박사팀과 함께 염색체 이상에 의해 다운증후군 등의 질환을 갖고 태어날 수 있는 IVF용 배아를 선별하는 검사기법을 세계 최초로 개발했다. 그리고 2001년 리프로제네틱스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지난 4년간 염색체 검사기법의 혁신적 발전을 이뤄 현재 매우 다양한 유전질환 진단 능력을 갖추고 있다. PGD 시술 과정에서 OTC 결핍증 등 단일 유전자 돌연변이 장애를 가진 IVF 배아를 선별해낼 수 있다.
알렉시스가 결혼 후 자녀를 가지려 할 때 그녀의 주치의는 리프로제네틱스의 기술을 소개했다. 건강한 아이를 출산할 수 있다는 설명에 그녀는 남편과 상의해 자연 임신 대신 IVF를 결심했다. 이후 의사는 그녀와 남편의 구강에서 DNA 채취해 유전자 지도를 만들었고, 알렉시스에게 수주일 동안 임신 촉진제를 복용케 했다.
의사들은 그렇게 7개의 난자를 확보해 남편의 정자와 수정시켰고, 3일 뒤 각 배아마다 하나의 세포를 추출해 리프로제네틱스에 보냈다. 유전자 검사를 마친 리프로제네틱스는 바로 다음날 OTC 유전자 돌연변이가 있는 배아와 그렇지 않은 배아를 알려왔다. 이윽고 2013년 8월 11일 알렉시스는 X염색체 2개 모두 정상 OTC 유전자를 지닌 오드리를 출산했다.
“이처럼 좋은 기술을 개발해낼 정도로 머리 좋은 분들이 세상에 계셔서 정말 다행이에요. 적어도 제게는 유전 질환의 끈질긴 대물림이 이제 끝났습니다.”
무네 박사는 지금의 단일 유전자 돌연변이 배아의 선별이 시작에 불과하다고 강조한다. 이미 리프로제네틱스는 유방암 발병 배아의 진단법도 개발 완료했다. 유방암은 BRCA1과 BRCA2라는 2개 유전자의 돌연변이가 관여한다.
“머지않아 자폐증, 정신분열증, 알츠하이머 등을 일으키는 유전자적 결함을 지닌 배아도 선별할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그 다음에는 배아의 모든 유전자를 검사해 결함이 있는 녀석을 찾는 시대가 도래할 겁니다.”
무네 박사는 단일 유전자 돌연변이 검사가 가족의 유전질환 파악에 유용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알렉시스처럼 자신이 돌연변이 유전자의 소유자임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더욱이 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난자와 정자의 수정 과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예측 불가능한 돌연변이가 무려 3,000가지에 달한다. 많은 예비 부모들이 자신도 모르게 유전 질환을 물려주고 있다는 얘기다.
이와 관련 지난 5월 18일 주목할 만한 성과가 있었다. 배아를 모체의 자궁에 착상하기 전 전체 게놈의 서열 분석을 통해 모든 잠재적 유전자 돌연변이를 원천 봉쇄한 아이가 태어난 것. 이는 어디까지나 개념 실증을 위한 시도였지만 이르면 올해 내에 전체 게놈 서열 분석 비용이 1,000달러 이하로 낮아져 많은 예비부모들이 실질적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유전자 검사로 예측할 수 있는 것은 질병뿐만이 아니다. 건강한 아기를 선별할 수 있다면 다른 유전적 특징을 가진 아기의 선별도 가능할 테니 말이다. 미국과 멕시코, 인도에 센터를 운용 중인 임신연구소(TFI)의 제프리 스타인버그 박사는 이를 이렇게 설명한다.
“한 번 배아의 염색체를 볼 수 있고, 실체를 규명할 능력이 확보되면 배아의 모든 것을 연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의 의미는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 확장될 것입니다. 언젠가 사람들은 의사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우리 아이는 딸이었으면 해요. 다운증후군과 유방암 유전자가 없었으면 좋겠고, 눈은 파란색이라야 해요’라고요.”
마치 바비 인형을 고르는 듯한 이런 상황은 이미 일정부분 현실화됐다. 대다수 국가에서 IVF를 통한 성별 선택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있음에도 암암리에 IVF와 PGD가 성별 선택 임신 방법으로 전용되고 있는 것. 시술비용이 1만8,000달러에 달하지만 미국 내에서 IVF 붐이 일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는 게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실제로 2006년 한 연구팀이 415곳의 출산클리닉을 조사한 결과, 시술자의 50% 정도가 치료 목적이 아닌 이유로 PGD를 시술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당연히 그 비율은 계속 높아지고 있는 상태다. 스타인버그 박사 또한 TFI를 찾은 부부의 무려 90%가 성별 선택을 원하고 있다고 밝혔다.
미국 뉴저지주에 거주하는 섀넌 트와이슬러도 그랬다. IVF의 도움을 받아 두 아들을 얻은 그녀는 셋째가 딸이기를 바랬다.
“저희 부부로서는 그리 대단한 일이 아니었어요. 의사에게 딸을 원한다고 말하면 그뿐이었죠. 과거 3번의 IVF 시술 과정에서 만들어진 배아 중 건강한 여성 배아가 하나 있었거든요.”
의사는 올 1월경 그 배아를 그녀의 자궁에 착상시켰고, 지금까지 정상적으로 자라고 있다. 스타인버그 박사는 이 같은 성별 선택이 ‘맞춤형 아기’의 신호탄이 될 것으로 예견한다. 이미 그는 파란 눈을 가진 아이를 선별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홍채의 기질(基質) 속 멜라닌 색소의 양을 제어하는 유전자를 잘 선택하면 돼요. 색소가 많으면 갈색, 어느 정도 있으면 녹색이나 녹갈색, 전혀 없으면 파란색 눈이 됩니다.”
사실 그는 지난 2009년 TFI에서 눈의 색상 선별 서비스를 제공하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당시 반향이 엄청났어요. 서비스를 받겠다는 부모들이 몰려왔고, 그만큼 많은 사람들로부터 협박도 받았습니다. 심지어 바티칸 교황청의 과학자들까지 전화를 걸어와 결정을 재고하라고 권했어요.”
결국 TFI는 발표를 번복했고, 지금껏 관련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있지 않다. 이 기술이 사회적 수용력보다 앞서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하지만 스타인버그 박사는 대중들의 생각이 이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변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비판여론이 많이 수그러들었습니다. 20년 전만 해도 사람들은 IVF에 의해 좀비가 양산될 거라고 여겼죠. 그러나 지금은 IVF로 태어난 사람들을 흔히 만날 수 있어요. 자녀의 눈 색상을 선택하는 정도는 5년 내 일상화 될 것입니다.”
그는 눈에 이어 머리카락의 색상 선택도 눈앞에 다가와 있다고 설명했다.
“올 6월 미국 스탠퍼드대학 연구팀이 그에 관여하는 유전자 변형을 규명해냈습니다.”
물론 이런 기술이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의대의 리처드 폴슨 박사도 그중 한사람이다.
“그것이 말처럼 간단한 문제가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제 관점에서 눈 색상 선택이 가능하다고 웹사이트에서 광고하는 사람들은 지적으로 정직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해 스타인버그 박사는 자신의 기술을 적용했을 때 눈 색상 선택 정확도가 90~94%라고 전했다. 그래서 이를 99%로 높이고자 연구자금을 모으고 있으며, 이 목표가 달성됐을 때 서비스를 개시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집고 넘어갈 것이 있다. 부모에 의한 자녀의 특성 선택이 뜨거운 사회적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이유는 지금 당장 무엇을 선택할 수 있는지와 상관없다는 점이다. 그보다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인간의 생명과 관련해 인위적 개입의 여지가 열렸을 때 나타날 사회적·윤리적 가치 붕괴가 핵심이다.
예컨대 부모에게 선택받지 못한 배아의 처리 문제를 들 수 있다. 배아가 아무리 건강해도 성별과 눈의 색깔이 부모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폐기처분을 피할 수 없는 탓이다. 과학계는 난자와 정자가 수정된 후 14일 이후부터 생명체로 보지만 종교계는 수정된 순간부터 생명체라며 배아의 폐기를 일종의 살인 행위로 규정한다.
특히 성별 선택이 공식 허용되면 눈과 머리카락의 색상 선택을 막을 명분이 없어진다. 종국에는 기술 발전에 따라 키와 얼굴 생김새 같은 외모는 물론 성격과 체력, 심지어 지능까지 선별하게 될 수도 있다. 이때는 돈 많은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이들이 출중한 외모와 체력, 지능을 무기로 평범한 가정의 아이들을 압도하며 사회를 지배할지도 모른다. 슈퍼 베이비들에 의한 유전자 차별의 시대를 그린 영화 ‘가타카’의 스토리가 현실이 되는 것이다.
물론 카타카의 세상은 머나먼 훗날의 이야기다. 지능과 키, 외모 같은 특징은 무수한 유전자와 극도로 복잡한 과정에 의해 결정되며 아직 과학계는 그 실체를 규명하지 못했다. 폴슨 박사는 2014년 현재 인공수정 클리닉에서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서비스는 부모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배아들 중 특정 형질을 가진 배아를 고르는 것 정도라고 강조한다.
부모의 IQ가 평균 수준인데 IQ 160의 수재로 커나갈 배아를 착상시켜줄 방법은 없다는 뜻이다. 그러려면 유전자 조작이 필요하지만 어떤 유전자를 어떻게 조작해야할지 누구도 알지 못한다.
“1,000가지의 특징이 적힌 메뉴판을 보면서 부모가 원하는 특징을 고를 수 있게 될 것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을 공산이 큽니다.”
필자는 3살 된 아들이 있고, 현재 딸을 임신한 어머니다. 개인적 의견을 말하자면 꿈에서도 아이의 특징을 선택하고자 원한 적이 없다. 딸의 출산일이 기다려지는 이유는 필자와 남편의 유전자를 반씩 물려받은 사랑의 결실이어서다.
다만 모든 부모와 마찬가지로 딸아이가 필자의 좋지 않은 척추나 남편의 역류성 식도염을 물려받지 않았으면 한다. 그래서 의학적 이유에 따른 배아 선택은 찬성하는 입장이다. 둘째가 딸이라는 소식에 뛸 듯이 기뻐했던 필자였기에 가정의 성별 균형을 이루려는 욕망도 어느 정도 이해한다. 그렇지만 파란색 눈의 딸을 얻으려고 배아를 선별하는 일은 수긍이 되지 않는다. 눈이 갈색이라고 딸을 덜 사랑할 일은 결코 없을 테니 말이다.
빠르게 발전하는 유전학 연구를 감안할 때 어쩌면 한 세대 또는 두 세대가 지난 시점에는 맞춤형 아기가 가능해질 수 있다. 지금 우리는 미래의 혼란에 대비해 다각적이고 진지한 논의를 거쳐 합리적인 접점을 찾아야 한다. 질병 치료와 인간 존엄성의 간극을 좁히지 못한다면 가타카의 모습은 우리의 내일이 될 수도 있다.
난모 세포 조작술
미 식품의약국(FDA)이 유전 질환의 대물림을 막을 또 다른 첨단기술인 ‘난모(卵母) 세포 조작술’의 임상시험 승인을 검토 중이다. ‘미토콘드리아 교환술’이라고도 불리는 이 기술은 3명의 DNA를 이용한 시험관 아기 시술(IVF)이다.
미토콘드리아에 장애를 가진 여성은 IVF가 불가하다. 모든 사람은 세포핵의 게놈에 더해 모계로부터 100% 유전되는 미토콘드리아 게놈을 가지는데, 미토콘드리아 유전자에 문제가 있으면 근육성 이영양증, 심장병, 간질, 지적장애 등의 질환이 유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의 해법으로 나온 것이 바로 난모세포 조작술이다. 기존 IVF와의 차이는 정자와 난자의 수정이 이뤄지기 이전 또는 이후에 모계의 난자핵을 기증자의 것으로 대체한다는 점이다. 이렇게 하면 부모의 건강한 핵 DNA와 기증자의 건강한 미토콘드리아를 가진 배아가 탄생한다.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는 외모, 인성 등 거의 모든 유전적 특징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 부모 2명의 DNA만으로 태어난 아이와 전혀 다르지 않다.
현재 관련연구를 수행 중인 뉴욕 줄기세포 재단(NYSCF)의 수잔 솔로몬 박사에 의하면 이미 영국 정부가 내년 4월부터 이 시술을 공식 허용키로 결정했다. 다만 모든 유전자 조작기술과 마찬가지로 난모 세포 조작술도 윤리성 논란에 휩싸여 있다.
신생아 게놈 시퀀싱 매커니즘
미국 칠드런스 머시 병원 소아 게놈 의료센터의 의사들은 바이오기업 일루미나와 함께 신생아 게놈 전체의 서열 분석법을 개발했다. 덕분에 이곳에서는 희귀 질병의 유전적 원인을 단 50시간 만에 알아낼 수 있다.
STEP 1
2013년 12월 31일 태어난 엘리아나 루이스는 출생 직후 혈당수치가 동요하는 증세가 나타났다. 수분마다 한 번꼴로 뇌 발작도 일으켰다. 약물치료에 실패한 뒤 의사들은 엘리아나와 부모의 혈액샘플을 채취, 게놈 분석실로 보냈다.
STEP 2
분석실 기술자들이 혈액에서 DNA를 분리, 수백만 번 복제한 뒤 판독이 용이하도록 초음파로 잘게 자른다. 이 DNA 조각들이 담긴 칩을 일루미나의 게놈서열 분석기 ‘하이시크 2500’에 넣으면 26시간 내 분석이 완료된다.
STEP 3
슈퍼컴퓨터가 DNA 분석 결과 및 표준 유전체를 참고해 유전자 조각들을 재배열한다. 그리고 의뢰받은 3개의 샘플과 표준 유전체 사이의 차이점을 찾아낸다. 이 차이점은 500만개에 달할 수도 있지만 대다수는 건강상 해롭지 않다.
STEP 4
생물정보학 소프트웨어가 엘리아나에게서 부모에게 없는 SCN2A 유전자 돌연변이를 발견했다. 임신 전에 부모의 정자 또는 난자에 자연발생적으로 나타난 돌연변이로 보인다. 이 돌연변이가 희귀 소아 간질인 ‘오타하라 증후군’을 발병시켰다.
STEP 5
의사들이 진단결과에 맞춰 새로운 치료를 단행했다. 이에 올 3월 오타하라 증후군 치료를 위한 저탄수화물 식이요법을 시작할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됐고, 5월에는 발작 증세가 제어되면서 퇴원했다.
오르니틴 (ornithine) 아미노산의 일종.
PGD Preimplantation Genetic Diagnosis.
표준 유전체 (reference genome) 게놈 분석에 기반한 질병 관련 유전인자 등의 검색에 있어 기준(표준)이 되는 게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