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볼라 창궐 시대의 기업 활동

BUSINESS IN THE TIME OF EBOLA

전염병이 대유행하는 지역에서 기업은 어떻게 운영되고 있을까? 라이베리아 Liberia에 있는 아르셀로미탈 ArcelorMittal의 철광석 사업부는 자사뿐만 아니라 주변의 지역사회까지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BY ERIKA FRY


아르셀로미탈의 토카데 Tokadeh 철광석 광산의 임원진은 지난 7월 첫 일주일간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용서받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2013년 말 이 지역에 에볼라 바이러스가 창궐했을 때, 이 바이러스는 이미 확산될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하지만 6주간 라이베리아에선 에볼라가 전혀 발생하지 않았다. 이후 수 마일 떨어진 곳에서 몇몇 새로운 감염 사례가 발생했지만, 근로자를 보호하기 위해 회사가 적극적인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임원진은 걱정이 없었다.

에볼라와는 관련 없지만, 아르셀로미탈은 분노한 지역 주민들이 7월 3일 일으킨 시위도 잘 이겨냈다. 이들은 토지를 제공했지만 회사로부터 받은 보상 액수가 충분치 않다며 들고 일어났다. 시위대는 폭력적으로 변해, 광산 주위 시설을 엉망으로 만들고 토지에 불까지 질렀다. 이들은 위협적으로 공격했지만 곧 체포됐고 임원진은 안도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불과 며칠 후인 7월 9일, 라이베리아 금융 컨설턴트이자 4월부터 아르셀로미탈의 공공보건 담당자를 맡은 라이베리아계 미국인 패트릭 소여 Patrick Sawyer가 동료들에게 여동생의 사망소식을 알렸다. 사망원인은 에볼라로 추정됐고, 이는 그 후 사실로 밝혀졌다.

소여는 동생이 감염됐을 당시 그와 거의 접촉한 일이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아르셀로미탈은 21일간 그를 수도 몬로비아 Monrovia에 있는 보건부로 보내 격리시키고 검사를 받도록 했다. 이 철강 대기업의 관리자들은 이 기간 동안 소여에게 계속 월급을 지급했고, 정기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 다른 직원들에게 신속하게 정보를 제공해 안심시켰다.

회사에 따르면 9일 동안 소여는 에볼라 증상이 없다며 아르셀로미탈 관계자들을 계속 안심시켰다. 그는 줄곧 괜찮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이후 그는 아무 말도 전하지 않았다. 이틀 후 회사는 소여가 라이베리아를 떠나 가나와 토고를 거쳐 나이지리아에 갔다고 전해 들었다. 그가 라고스 Lagos 국제공항에 도착했을 땐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 소여는 재빨리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3일 후 결국 에볼라로 사망하고 말았다. 그의 죽음 자체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또 다른 무서운 일은 그가 나이지리아에 전염병을 퍼뜨렸다는 사실이었다. 나이지리아는 19명이 에볼라에 감염된 후 결국 봉쇄되었다.

이번 사례는 에볼라 바이러스가 양심적인 사람들(이번 경우는 아르셀로미탈)이 만든 방어 시스템을 얼마나 빨리, 또 은밀히 무너뜨리는지, 이 전염병의 독성과 인간의 나약함(이번 경우는 소여에게 격리 조건을 따르고자 하는 의지가 없었다는 것)이 얼마나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지 보여주었다. 단 며칠 만에 이 회사는 안도감을 느끼다 국제적으로 질병을 퍼뜨리게 직원을 방치했다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이 기사는 전염병 창궐 상황에서 생존하면서 기업활동을 이어가려는 어떤 기업에 관한 이야기다. 지난해 말 기니에서 처음 발생한 후 곧바로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으로 퍼진 에볼라는 약 5,000명-공식 통계 수치지만 실제 3분의 1에 불과하다고 한다-의 목숨을 앗아갔다. 앞으로의 상황도 암울할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라이베리아와 시에라리온의 감염자 수는 1월까지 140만 명으로 증가할 수 있다. 세계은행은 이 전염병이 빈곤에 허덕이는 서아프리카 국가에 326억 달러의 비용을 발생시킬 것이라고 예측하기도 했다.

하지만 에볼라 창궐이 라이베리아만큼 치명적인 곳은 없다. 현재까지 이 작은 국가에서 에볼라로 사망한 사람이 약 3,000명이나 된다. 이 위험지역 한가운데서 아르셀로미탈은 광산 사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심지어 에볼라 히스테리가 전 세계로 퍼지고 있는 상황에서, 약 4,500명의 라이베리아인들과 200여 명의 외국인들이 여전히 광산업, 운송업 및 철광석 선적 사업을 지속하고 있다. 거의 평상시와 다름없이 돌아가고 있다. 라이베리아에서 사업을 할 땐 많은 리스크에 직면하지만, 에볼라는 그중 하나로 간주되지 않았다. 과거에 에볼라는 콩고와 우간다의 비교적 인구가 적은 외딴 지역에서만 발생했다. 이제까지 이렇게 치명적인 전염병과 맞서 싸워야 했던 다국적 기업은 없었다.

아르셀로미탈의 CEO 빌 스코팅 Bill Scotting은 “전형적인 블랙 스완 Black Swan *역주: 극단적으로 예외적이어서 발생 가능성이 없어 보이지만 일단 발생하면 엄청난 충격과 파급효과를 가져오는 사건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모든 발생 가능한 블랙 스완에 대해 논의하고 무슨 일이 벌어질지 예측하지만, 에볼라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이었다.” 그는 에볼라가 자연재해만큼이나 심각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연재해였다면 맞서 싸웠을 기업들도 에볼라가 야기하는 공포감엔 대부분 도망가기 바빴다. 16개 광산을 운영하는 스코팅은 국제적인 혼란에 익숙하다. 올해 초 그의 직원 278명이 우크라이나 군대에 징집됐고, 그중 9명이 사망했다. 지난해에는 임원 중 한 명이 멕시코에서 마약 범죄 조직에 의해 피살됐다. 하지만 여전히 스코팅-그는 최근 몇 달 동안 3분의 1의 시간을 에볼라 대응에 사용했다은 에볼라가 전례 없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르셀로미탈은 2013년 총 매출 790억 달러를 올린 글로벌 대기업이다. 이는 라이베리아 GDP의 약 40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이 회사는 세계에서 가장 큰 강철업체로 약 60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다. 이 회사가 2005년 라이베리아에 입성했을 당시에는 미탈 스틸 Mittal Steel이라는 사명을 쓰고 있었다. 미탈 스틸은 베슬리헴 스틸 Bethlehem Steel의 자산을 인수하는 등 여러 회사를 인수하며 빠르게 성장해왔다. 이후 철광석을 열렬히 원하게 되면서 이 회사는 라이베리아에 진출했다. 라이베리아에선 유혈이 낭자한 두 차례의 내전-두 번째 내전은 2003년 끝났다-으로 420만 인구 중 무려 2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라이베리아 진출 1년 후 미탈 스틸은 최대 라이벌 기업인 아르셀로 Arcelor를 인수했다. 아르셀로미탈은 전후 라이베리아에 대규모 투자를 한 첫 번째 기업이었다. 7억 달러의 비용을 들여 지금은 없어진 라이베리아-미국-스위스 미네랄 사(Liberian-American-Swedish Minerals Co)가 1960~70년대 운영하던 광산을 재정비한 바 있다. 25년 동안 아르셀로미탈이 라이베리아 정부로부터 받은 혜택은 엄청났다. 이 회사는 뷰캐넌 Buchanan 항에서부터 예케파 Yekepa 광산 주변의 광활한 지대까지 세 카운티에 걸쳐 있다. 정부가 소유하고 이 회사가 운영하는 150마일 길이의 철도가 이 두 지역을 연결하고 있다. 때문에 아르셀로미탈의 영역을 가로지르지 않고선 라이베리아의 북쪽에서 서쪽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다.

처음 설립됐을 당시만 해도 아르셀로미탈은 전쟁의 여파로 거의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철도는 걸인들로 가득 찼고 밀림으로 뒤덮여 있었다. 뷰캐넌 항구에는 덩그러니 남은 배 한 척만이 썩어가고 있었다. 예케파에는 불법 거주자들이 많았고, 시설들도 망가져 있었다. 지역 병원이 환자들에게 엑스레이를 찍으려면 기계 가동에 필요한 연료 1갤런을 준비해 오라고 할 정도였다. 아르셀로미탈은 2011년 광산을 재정비해 현재 라이베리아에서 연간 500만 톤의 철광석을 수출하고 있다. 이 회사가 매년 7,000만 톤의 광물을 채굴하는 것을 감안하면, 상대적으로 적은 양이라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재 아르셀로미탈은 라이베리아에 17억 달러를 투입해 광산을 확장하고, 이를 통해 생산량을 세 배로 늘릴 계획을 갖고 있다. 이 프로젝트는 매우 중요하다. 라이베리아가 아르셀로미탈의 2015년 광산업 목표 성장률에서 3분의 2를 차지하는 철광석 생산지이기 때문이다.

에볼라 때문에 국경이 차단되고 항공기 이륙도 불가능해졌다. 바이러스가 퍼지는 범위를 넘어 훨씬 멀리까지 불안감이 확산되고 있다. 하지만 아르셀로미탈은 확고하다. 이 회사는 라이베리아에 계속 머무를 예정이다. 전염병 확산 공포에도 광범위한 조치와 예방책 덕분에 사망자가 현재까지는 단 한 명에 불과했다. 하지만 리 포코르스키 Lee Pokorski-3년간 라이베리아 안보에 관해 자문을 제공한 후 지난 9월 글로벌 보안 책임자가 됐다-는 “참고할만한 에볼라 관리 보고서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는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이제까진 별다른 실수가 없었지만, 학습 곡선(learning curve) *역주: 학습의 결과로 일어나는 행동의 변화 현상을 도식화한 것이 매우 가팔랐다.”

2014년 초봄 아르셀로미탈의 글로벌 보건, 안전, 환경 및 안보 책임자로 임명된 데이비드 빈트 David Vint는 당시 이례적인 보고서 하나를 보았다. 기니 국경선에서 단 30마일 떨어진 곳에서 에볼라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라이베리아의 서쪽 지역인 로파 Lofa 카운티에서도 의심 사례들이 나오고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떠올린 생각은 ‘에볼라가 뭐지?’였다. 직함이 무색할 만큼 그는 한 번도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해 들어보지 못했다. 이는 당시 에볼라가 얼마나 예상치 못했던 위협이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빈트는 생소한 이름의 이 질병을 인터넷에서 찾아봤다. 그는 검색 결과를 보고 깜짝 놀랐다.

빈트가 깜짝 놀란 건 에볼라 시나리오가 회사의 비상 대응 계획을 완전히 무력화시킨다는 점이었다. 광산 확장을 위해 수많은 하청업자들을 불러들인 상황에선 특히 그랬다. 아르셀로미탈의 광산 규모는 500 평방 마일로, 직원들뿐만 아니라 회사와 아무런 관련 없는 2만 5,000여 명의 라이베리아인들도 살고 있다. 한편 님바 Nimba 카운티의 북쪽 끝에 있는 아르셀로미탈 사업장은 기니와 국경선을 맞대고 있는데, 이 허술한 국경선을 따라 무역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그 중심부에 예케파가 있다. 토카데 광산으로부터 20마일 떨어진 예케파의 동쪽 끝 부분에는 아르셀로미탈의 본사, 병원, 식당, 노천 극장 및 주거지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지역에 바이러스가 침투하지 못하도록 하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빈트와 그의 동료들은 아르셀로미탈 직원들을 지키기 위해선 주변 지역 사회까지 방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회사는 의료 협력업체인 인터내셔널 SOS에 도움을 요청했다. 이 업체는 시설마다 출입문을 하나로 하고, 입구에 손 세정제와 체온 스캐너-총 모양으로 이마에 대고 체온을 잰다-를 설치하라고 조언했다. 그렇게 되면 체온이 37.5도 이하인 사람들만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에볼라 전염을 막을 수 있다(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됐더라도 열이 발생하기 전에는 전염되지 않는다). 회사는 열이 높은 사람들을 병원으로 보내 검사를 받게 했다. 그리고 이러한 스크리닝 시스템은 외국 협력업체들을 안심시켰다. 당시 열이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다른 질병 때문이었다. 원인은 에볼라가 아닌 말라리아 때문인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문제는 에볼라에 대한 정보 부족이었다. 일반 사람들 사이에선 에볼라에 대해 해외 원조를 유치하기 위해 정부가 주도하는 장기 적출 계획이나 계략과 같은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한편 외국 근로자들은 인터넷에 떠도는 자극적인 허위 정보에 겁을 먹었다. 하지만 회의론도 문제였다. 아르셀로미탈의 철광석 사업 책임자 클레버 실바 Kleber Silva는 “가장 힘든 부분은 이곳에선 아직 발생하지도 않은 질병에 대해서도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때문에 아르셀로미탈의 관리자들은 아드리아노 두세 Adriano Duse 또는 ‘두세 교수’-그는 회사에서 다양한 호칭으로 불린다-를 고용한 것을 최고의 투자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에볼라를 비롯한 여러 질병 전문가인 그는 지난 4월 라이베리아에 도착해 4주간 근로자와 보건 분야 종사자, 그리고 지역 주민들에게 에볼라 바이러스에 대한 교육을 진행했다. 예상 밖으로 이 교육은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이 회사 보건·안전 팀에서 근무하는 켄 브래들리 Ken Bradley는 “그는 재미있는 사람”이라며 “어느 날 오후 회사 노천극장에서 두세가 중년의 광산 근로자들을 일어서게 해 손 씻기 훈련을 시켰다”고 말했다. 그는 두세는 에볼라가 문 손잡이와 화장실 변기를 통해 감염된다는 등 흔히 떠돌던 잘못된 루머를 일축하고, 에볼라는 “감염되려고 노력해야 감염되는 바이러스”라며 근로자들을 안심시켰다고 덧붙였다.

두세는 라이베리아에서 아르셀로미탈 임원들과 정기 모임을 갖고, 이들과 함께 에볼라가 창궐하는 상황에서의 경영 전략을 수립했다. 그 결과 ‘트리거 매트릭스 trigger matrix’가 탄생했다. 트리거 매트릭스는 다양한 시나리오와 그에 대응하는 경고 단계를 담은 정교한 문서였다.

‘경고 발동 단계’는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는 라이베리아의 아르셀로미탈 시설 근처에 얼마나 에볼라 사례가 많이 발생하느냐와는 상관이 없다. 그는 “주위 사람들이 병에 걸린다는 건 이제 기정사실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만약 ‘작업장 반경 5마일 이내에 에볼라 감염 사례가 두 건 발생할 경우 경고 단계를 올려야 한다’고 규정하면, 회사의 모든 경영 및 운영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이다. 회사를 안전하게 지키고, 근로자 중 아픈 사람들을 면밀히 모니터링하면 두 번, 다섯 번 심지어 100건의 에볼라 사례가 발생해도 문제는 없다.” 오히려 경고 발동의 계기는 국경 폐쇄나 비상사태 등 외부 사건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물론, 당시 봄에는 경고 발동의 가능성은 점점 낮아지고 있었다. 라이베리아에서 13건의 에볼라 사례가 발생한 후, 통제가 되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스코팅은 “우리 모두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고 말했다.

회사는 체온 스캐너를 계속 유지하는 등 성실히 에볼라와 싸웠고, 사람들 사이에서 에볼라에 대한 걱정이 점차 누그러지고 있었다. 라이베리아 각료들이 7월 시위 당시 이 회사를 찾았을 때, 회사 입구에서 체온을 재야 한다는 사실에 불만을 표할 정도였다.

하지만 전 세계가 다 알다시피, 이러한 평온함은 곧 사라져버렸다. 에볼라는 고립된 외딴 지역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인 듯 보였다가, 소여 사건 후 갑자기 전 세계적인 패닉을 가져왔다.

패트릭 소여가 라이베리아 정부와 아르셀로미탈 두 곳에서 일했기 때문에, 회사는 당시 언론보도에서 소여와의 연관성을 대부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소여의 죽음은 남아 있는 에볼라 회의론자들에게 에볼라에 대한 강력하고도 끔찍한 증거가 되었다. 게다가 그가 사망할 당시 라이베리아에선 에볼라가 급증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르셀로미탈에겐 에볼라로부터 회사를 안전하게 지키고 바이러스가 절대 침투할 수 없도록 하기 위한 계획이 더욱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었다.

아르셀로미탈의 상황은 눈에 띄게 변했다. 그동안 크고 작은 변화가 있었다. 직원들은 서로 악수도 하지 않고, 심지어 악수 대신했던 주먹을 서로 부딪치는 행동도 더는 하지 않고 있다. 에볼라에 대한 농담도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친구와 가족을 잃었다. 어떤 직원은 사람들이 모여도 괜찮을 때까지 결혼식을 미뤄야 할지 회사 임원에게 상담을 요청하기도 했다(그는 결국 결혼식을 미뤘다).

아르셀로미탈 라이베리아 지사는 런던에 있는 모 회사와 하루에 두 번 콘퍼런스 콜을 갖고 매일 아침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통해 직원들은 에볼라 정보를 공유하고 질문도 할 수 있었다. 매우 기본적인 수준으로 들리겠지만, 직원들 대부분에겐 믿을만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이메일이나 다른 수단이 없었다. 때문에 이 회의들은 에볼라를 이해하고 상황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회의는 또한 직원들을 감시하는 데도 좋은 수단이었다. 소여의 사례는 감염된 사람과 최소한의 연관만 있어도 모니터링하려는 회사 결정에 정당성을 부여했고, 인간 행동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회사는 질의서를 돌려 직원들에게 에볼라 증세가 있는지, 또 에볼라 환자와 접촉한 일이 있는지 물었다. 아울러 직원들에게 걱정거리를 서로 공유하라고 독려하기도 했다. 회사는 에볼라 정책을 진지하게 생각했다. 실바는 “우리는 분명 진실을 원한다”고 말했다. 현재까지 아르셀로미탈이 추가로 특별관찰 대상에 올린 직원은 단 18명에 불과하다. 첫 15명은 상태가 호전돼 21일 만에 복귀했고, 세 명은 아직 격리돼 있다(아르셀로미탈은 또 에볼라와 관련된 오명을 벗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특별관찰 상태를 벗어난 이들은 CEO로부터 일일 회의에서 공개적으로 환영인사를 받고, 실바에겐 감사 편지를 받는다).

지난 7월 아르셀로미탈은 30km 완충 지대를 두는 등 사업장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배가했다. 에볼라 훈련을 주도하기 위해 연락관들을 50개 지역사회에 보냈고, 에볼라 창궐로 정부가 7월 학교 폐쇄를 명령했을 때 지역사회에 교사들을 파견했다. 회의론이 경각심으로 바뀌면서 발전이 있었던 셈이었다. 그 과정에서 아르셀로미탈은 더 큰 신뢰를 얻고 강력한 정보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다. 앞으론 지역 사회 주민들이 보건 당국에 알리기 전, 에볼라 의심 사례를 이 철강 회사에 먼저 알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아르셀로미탈은 또 정부로부터 고급 정보를 많이 얻을 수 있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이 회사가 당국을 지원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기 때문이었다(이 회사는 에볼라가 돌기 시작한 후부터 라이베리아의 에볼라 태스크포스 역할을 했다). 아르셀로미탈은 카운티 대부분에게 에볼라를 통제할 역량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에볼라 의심 사례를 발견하고 모니터링 할 수 있는 ‘감염 추적 팀’이 없었다. 회사는 이런 팀을 구성하기 위한 프로젝트에 비용을 지불했다. 동시에 회사는 위험에 가장 많이 노출된 직원들을 파악하기 위해 직원들과 지역 하청업자들의 거주지를 파악하고 구분했다. 이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라이베리아에선 주소나 심지어 지역 이름조차도 표준화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예케파만 해도 6가지나 되는 표기를 가지고 있다.

아르셀로미탈의 노력에도 에볼라 위기는 8월 결국 실질적인 정부 폐쇄로 이어졌다. 거의 모든 공무원들이 3주간 집에 머무르라는 지시를 받았고, 아직도 복귀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다. 회사는 세관 감시원들이 별로 없는 상황에서도 철광석과 물자를 항구로 운반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8월 중순, 라이베리아는 통행금지령을 내렸다. 24시간 철광석을 운반하던 아르셀로미탈은 차량 운송을 위한 특별 허가를 받아야 했다.

기본적인 물류 운송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에볼라가 돌기 전 회사는 바나나, 자두, 고기 및 기타 신선품을 기니에서 수입했다. 하지만 에볼라가 창궐한 후, 썩은 자두가 바이러스를 퍼뜨릴 수 있다는 루머가 돌았다. 야생고기에 대해서도 비슷한 공포가 나타났다. 회사는 사실이 아니라고 거듭 밝혔지만, 곧 다른 이유로 기니에서의 물자 공급이 끊겨 버렸다. 바로 국경이 폐쇄됐기 때문이었다. 아르셀로미탈은 라이베리아 수도 몬로비아에 의존하기 시작했지만, 공급받을 수 있는 식량이 없었다. 회사는 72시간 외출 금지-시에라리온에선 시도됐지만, 라이베리아는 시도된 적이 없었다-같은 일이 발생했을 경우, 직원들에게 신선한 식품을 충분히 공급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들여 전세기를 구입했다. 이 같은 혼란 외에도 회사가 대비해야 하는 최악의 시나리오는 또 다른 직원이 에볼라에 감염되는 것이다. 아르셀로미탈은 임시 격리 시설과 에볼라 치료 센터를 세웠지만, 외국인 근로자가 감염됐을 경우 가장 이상적인 조치는 그 환자를 본국으로 후송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정확한 타이밍과 해당 국가의 허가가 필요하다. 또 비행기가 통과하는 국가들의 허가도 필요하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을 처리하기에 훨씬 더 힘든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많은 국가들이 격리 수단을 도입하고 있고, 서아프리카에서 온 사람들을 받기를 꺼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터내셔널 SOS-아르셀로미탈 대신 이 일을 대부분 맡아 처리한다-의 안드레 윌렘스 Andre Willemse 박사는 “상황이 매일 변하고 있다”고 말했다. “열이 있는 환자를 항공기로 실어 나르는 과정이 매우 복잡해졌다. 에볼라 때문에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아르셀로미탈 라이베리아 지사가 받은 가장 큰 타격은 7월 발생한 회사 시설 공격도, 직원의 사망도 아니었다. 사업장 주변에 에볼라 사례가 걱정스러울 정도로 늘고 있다는 사실도 아니었다. 실제로 기업 운영을 방해하는 것은 8월 있었던 일련의 발표였다.

8월 6일 라이베리아는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아르셀로미탈의 하청업체들-대부분 광산 확장에 참여했다-은 계약 파기를 허용하는 불가항력 조항을 재빨리 발동시켰다. 단 며칠 만에 약 2,400명의 협력업체 직원들이 이 국가를 빠져나갔다. 그 여파는 즉시 나타났다. 광산을 운영할 인력이 아직 충분히 남아 있었지만, 광산 확장 프로젝트는 대부분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후 8월 17일 케냐 항공은 라이베리아에 대한 여객기 운행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 항공이 비슷한 결정을 내린 직후 일어난 일이었다.

항공기 운항 취소는 아르셀로미탈의 ‘트리거 매트릭스’에 영향을 미쳤다. 이 사건으로 회사는 경보 수위를 적색 단계로 올렸고, 130명의 외국인 근로자들을 본국으로 보냈다. 항공기 운항 취소와 외국인 송환의 인과 관계가 그렇게 확실한 건 아니었지만, 항공사의 결정은 시사하는 바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이 항공편이 없으면 비상 소개 시 외국인 근로자를 모두 본국으로 보낼 좌석을 확보할 수 없었다. 운항 취소는 또한 여행 경로를 복잡하게 했고, ‘휴가 차’ 많은 외국인들을 해외로 보내는 비용도 증가시켰다(현재로서 영국 항공은 최소 2015년 3월까지 라이베리아로 항공기를 운항하지 않을 예정이다. 케냐 항공은 아직 계획을 발표하지 않고 있다).

물론 직원들의 사기가 트리거 매트릭스에 영향을 주진 않았다. 현지 직원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더 큰 감염의 위험을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들은 회사가 라이베리아에서 떠날까봐 두려워하고 있다. 때문에 회사의 철광석 사업 책임자인 실바는 라이베리아 방문 횟수를 늘렸다. 그가 돌아올 때마다 라이베리아 직원들은 놀라며 기뻐했다.

다른 한편으로 외국인 근로자들은 동료들이 떠난 후에 느끼는 외로움과 집으로 돌아오라는 가족들의 압력에 대해 토로하고 있다(그들은 남아있는 사람들끼리의 끈끈한 유대 덕분에 외로움이 덜해졌다고 말한다). 회사는 의료 전문가와 통화하고 싶어 하는 가족들을 위해 핫라인을 설치했다. 한편 모임이 금지된 탓에 회사에서의 즐거움도 상당 부분 사라졌다. 라이베리아에서 지역사회 지도 제작을 담당하는 톰 그랜트 Tom Grant는 “그냥 일하고 먹고 자고, 일하고 먹고 자는 게 전부”라고 말했다. 한여름 혼란스러운 상황이 절정에 달했을 때, 아르셀로미탈은 지역 경쟁사들에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회사의 공무 관련 담당자 조지프 매슈 Joseph Mathews는 “우리 모두는 당시 약간 무력한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정말 우리가 잘하고 있는 걸까’ 지켜 봐야 하는 상황이었다.” 아르셀로미탈은 정부 역량이 이미 한계에 도달했고, 때문에 회사가 보조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점을 오래전에 깨달았다. 7월 라이베리아 지사 직원들은 지역 NGO에 전화를 걸어 필요한 물자를 물어보기 시작했다. 회사는 한동안 장갑, 염소 살균제 및 개인 보호 장비 등 NGO의 요구사항을 충족시킨 후, 에볼라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기관에 창고를 거의 대부분 개방했다. 이제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건 뭐든 가져갈 수 있도록 허용하고 있다.

회사는 병원 개조비용을 대고, 앰뷸런스를 기증하고, 정부 에볼라 실험실의 전력을 위해 발전기를 제공했다. 또 구조대원들에게 거처를 제공했고, 미군이 건설을 계획하고 있는 이동식 병원을 위해 불도저로 땅을 정리해 주었다. 인터내셔널 SOS와 함께 라이베리아 국제공항과 항구에 체온 스캐너도 설치했다. 이 회사가 이끄는 기업은 파이어스톤 Firestone-아르셀로미탈 외에 라이베리아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유일한 다국적 기업이다-을 포함해 이제 70곳으로 늘었다. 회사는 현재 기부금을 모으며 기부의 우선순위를 정하고 있다.

포코르스키와 그의 팀은 이제 에볼라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인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은 광산 확장 프로젝트 재개에 필요한 2,700여 명의 추가 인력 및 하청업자들이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시설 외부에 예리한 철선으로 울타리를 치고, 격리 시설을 늘리고, 추가 인력을 수용할 수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비상 대응 계획을 검토하고 있다. 광산 책임자 스코팅은 라이베리아를 떠난 하청업자들과 협상을 시작했다. 그들의 반응은 긍정적이다. 일부는 재계약을 할지도 모른다. 그들이 이곳을 떠나기 전보다 에볼라 환자가 훨씬 더 많아졌는데도 말이다. 상상하기 힘들지만, 이제 에볼라가 창궐한 지도 1년이 다 돼간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아르셀로미탈은 직원들을 잘 지켜왔다. 말하자면 제방을 20피트나 높게 쌓아 올린 것이다. 그리고 이제 이 제방이 잘 버텨주길 바랄 뿐이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