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약해지지 마


직장생활 하면서 참 많이 들어본 말이 있다. 바로 하루 전 시무식 때 사장님께서 했을법한 말씀이다. 아마 "올해가 가장 힘든 한 해가 될 것입니다. 임직원 여러분은 허리띠를 바짝 졸라매고…" 뭐 이런 식으로 훈시를 하셨을 게다.

일부 순진한 새내기 직원들은 "올해가 진짜 힘든 한 해구나"라며 고개를 끄덕였을 수 있다. 물론 수긍할 수 있게 구체적인 수치와 함께 만만하지 않은 대내외 환경이 제시된다.

하지만 몇 년만 지나면 이내 공자님 말씀이 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게 된다. '가장 힘든 한 해'가 매년 계속되기 때문이다. 올해도 이 말씀을 들었으면 "아 예(아는 짧게, 예는 길게 발음)" 하면서 싱긋 웃으면 될 일이다.

그런데 지난해만큼은 그 말이 가슴에 와 닿은 사람이 많았을 것 같다. 지난해 연초부터 터진 저축은행 사태를 보자. 나이든 분들이 노후자금으로 한푼 두푼 어렵게 모은 돈을 저축은행에 넣었다가 날벼락을 맞았다. 그 돈이 전부였을 그분들이 저축은행 지점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물가와 전셋값은 또 어땠나. 물가는 지난해 10월 한 달을 제외하고는 매달 4%대 이상의 고공행진을 거듭해 주부들이 비명을 질러야 했고 전셋값은 몇 천만원씩 뛰어 더 작고 더 못한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고통스럽고 힘든 일 많지만

며칠 전 신문기사를 보면 월급 빼고 다 올랐다는 얘기가 확인이 된다. 지난해 9월까지 실질임금 증가율이 마이너스 3.49%로 외환위기 때인 지난 1998년(마이너스 9.31%)과 금융위기 때인 2008년(마이너스 8.54%)에 이어 세 번째로 낮았다. 월급이 제자리를 맴돌기는 고사하고 아예 주저앉았다.

이런 건 다 돈 문제라고 치부하자. 최근의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은 생각만 해도 마음이 미어진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하는 것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내 자식이 세상살기를 그만두는데 나에게 힘들다며 도와달라는 말도 못했다는 것을 감당할 부모가 있을까.

지난해 우리에게 기쁘고 행복한 일이 무엇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많은 사람들이 참 많이 고통을 느끼며 힘들게 산 한 해였다.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정희성 시인의 '저문 강에 삽을 씻고'는 이렇게 시작한다. 고된 일과를 마치고 흐르는 강물을 보며 거기에 그날의 슬픔도 같이 흘려버리지만 내일이 되면 똑같은 일상 속으로 돌아간다는, 참으로 막막하기만 한 삶이다.

올해도 이런 삶을 살아야 될까. 이런 삶을 살 수밖에 없는 것일까. 아니다. 그래서는 안 된다.

아주 가끔 사는 게 힘들거나 마음이 울적할 때 읽어보는 시가 있다. 올해로 101년째 살고 계신 일본의 시바타 도요 할머니가 쓴 '약해지지 마'다.

'있잖아, 불행하다고/ 한숨짓지 마/ 햇살과 산들바람은/ 한쪽 편만 들지 않아/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나도 괴로운 일/ 많았지만/ 살아 있어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나를 바꾸면 현실도 달라져

100년이 넘는 삶을 사는 동안 할머니는 오죽 괴로운 일이 많았을까. 하지만 그래도 살아보니 살아있는 게 좋았다고, 그러니까 아직 100살까지는 살 날이 구만리나 남아 있는 우리들이 약해지면 안 된다고 힘을 주신다.

올해도 우리에게 주어진 현실은 만만하지 않다. 취업ㆍ살림살이ㆍ퇴직ㆍ노후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그런데 다시 생각해보면 지난해만큼이야 힘들까. 지난해만큼 힘들면 또 어떠랴. 우리는 그런 지난해를 꿋꿋이 버텨내고 이렇게 새해를 맞았다.

그리스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현실을 보는 눈은 바꿀 수 있다'고 썼다. 좋은 말이다. 나를 바꾸면 현실이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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