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슈퍼컴퓨터와 '반지의 제왕'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12만명의 병사들이 싸우는 모습은 어떻게 촬영됐을까. 실제 12만명의 엑스트라를 동원했을까. 답은 바로 ‘슈퍼컴퓨터’다. 12만명의 엑스트라가 동원된 것이 아니라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12만개의 캐릭터를 이용한 것이다. 12만개 캐릭터의 각각은 인공지능을 이용한 각자의 독특한 전투스타일을 갖고 있다. 이 캐릭터들은 웨타 디지털(Weta Digital)이라는 특수효과 전문 회사에서 3,300개의 프로세서로 이뤄진 슈퍼컴퓨터를 활용한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 이에 따라 12만명이 실제 전투를 벌이는 듯한 장대한 스케일의 영화 촬영이 가능했던 것이다. 짧은 시간 안에 엄청난 계산을 해야 하는 금융 파생상품의 가격 계산은 누가 할까. 이 역시 슈퍼컴퓨터다. 맨해튼 월스트리트에 위치한 마이크로소프트와 코넬대학 공동 연구소에서는 금융 파생상품들의 가격을 실시간으로 계산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이 쉴 새 없이 돌아가고 있다. 슈퍼컴퓨터란 현존하는 세계 최고 속도의 컴퓨터군을 가리키는 말이다. 슈퍼컴퓨터 분야에서는 매년 세계에서 제일 빠른 컴퓨터 500개를 발표하고 있다. 최근 발표된 순위를 보면 미국은 전세계 500개 중 300여개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며 1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이어 영국과 일본이 30개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며 공동 2위를 차지하고 있다. 한국은 6개의 슈퍼컴퓨터를 보유하며 11위를 기록했다. 하지만 슈퍼컴퓨터를 무조건 많이 보유하면 빠른 계산을 요구하는 첨단 분야의 기술개발이 잘 진행되고 산업의 경쟁력이 한 차원 도약할 수 있을까. 그렇지만은 않다. 도입된 슈퍼컴퓨터를 잘 활용할 수 있는 전문인력이 있어야 한다. 먼저 금융ㆍ영화ㆍ제약ㆍ반도체 등 각각의 첨단 분야에 속한 우수한 연구자 및 기술자가 있어야 한다. 둘째로 우수한 슈퍼컴퓨터 프로그래머와 시스템 운영 전문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두 전문가들을 이어주는 교량 역할을 하는 슈퍼컴퓨팅 융합 설계자가 필요하다. 앞의 예에서 보면 먼저 영화 분야의 특수효과 전문가, 금융 파생상품 전문가들이 슈퍼컴퓨팅 융합 설계자와 협력해 계산모형을 슈퍼컴퓨터에서 동작시키는 것이 적절한지 검토하고, 적절하다면 슈퍼컴퓨터 구조에 맞도록 고성능 계산모형을 설계해야 한다. 다른 한편에서 슈퍼컴퓨팅 융합 설계자는 슈퍼컴퓨터 프로그래머 및 시스템 운영 전문가와 함께 고성능 계산모형이 효율적으로 슈퍼컴퓨터에서 동작하도록 프로그램을 설계해야 한다. 슈퍼컴퓨팅 분야에서는 이처럼 다양한 학문 및 기술 분야 전문가들간의 협업이 필요하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항공ㆍ전산유체ㆍ물리ㆍ생물ㆍ기상 분야 등 이공계 중심 연구자들이 슈퍼컴퓨팅의 주요 사용자였으나 최근에는 영화ㆍ특허ㆍ금융 등 더욱 다양한 분야의 전문 연구자들이 슈퍼컴퓨터를 사용하는 추세이다. 슈퍼컴퓨팅 기술 개발을 진행하다 보면 가장 많이 부딪히는 장애요소가 상호 기술협력의 부족이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다른 분야의 기술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너무 쉬운 것으로 오해하는 점들로 인해 긴밀한 협조가 이뤄지지 않아 융합기술 개발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슈퍼컴퓨터 하드웨어를 포함한 슈퍼컴퓨팅 인프라 스트럭처를 갖추는 데 많은 노력을 해왔으며 큰 성과를 이뤘다. 하지만 이제는 이러한 고성능 컴퓨팅 자원을 보다 다양한 기술에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기술 및 학문과 슈퍼컴퓨팅 기술을 연결해주고 조화롭게 협력할 수 있도록 해주는 슈퍼컴퓨팅 융합 설계자가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 즉 슈퍼컴퓨팅을 이용, 국제경쟁력을 가진 첨단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슈퍼컴퓨팅 융합 설계자가 산ㆍ학ㆍ연을 중심으로 육성돼야 하고, 이 융합 설계자를 중심으로 한 슈퍼컴퓨팅 기술 관련 여러 학문, 다양한 기술간 협력체계가 갖춰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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