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최고의 작가로 우뚝 선 김훈이 최근 한 강연에서 시간의 신비로움을 이야기하였다. 시간이 놀라운 모습으로 생명 속으로 흘러들고 있다는 내용이다. 여름에 읽은 ‘남한산성’의 줄거리가 새삼 떠오른다. 앨빈 토플러가 ‘부의 미래’에서 경쟁력의 원천으로 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목도 함께 떠오른다. 동서양의 작가와 학자가 이 시대에 우연치 않게 ‘시간’을 화두로 던진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
20세기의 끝 무렵인 1991년. 세계은행은 ‘World Development Report’를 통해 재미있는 내용을 발표한 적이 있다. 경제발전의 초기에 한 나라의 경제가 도약단계에 이르러 소득수준이 두 배가 되는 기간을 비교한 통계이다. 산업혁명의 발상지인 영국과 미국ㆍ일본ㆍ브라질ㆍ한국ㆍ중국 등 상대적 후발국들이 비교 대상이었다. 기간은 58년, 47년, 34년, 18년, 11년, 10년이 걸렸다. 뒤로 갈수록 경제발전의 초기에 소득이 두 배로 늘어난 기간이 짧다. 그만큼 선진국을 추격하는 속도가 빨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뒤?아가는 일은 좀 수월한 편이란 말인데 왜 그럴까. 그 이유가 흥미롭다. 늦게 출발한 국가들은 선진국이 창출하거나 축적한 것을 풍부하게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이유다. 게다가 과학기술ㆍ자본ㆍ설비 등을 스스로 해결했던 산업혁명 초기의 영국에 비해 후발국들은 해외를 통해 이러한 애로를 해결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른바 후발국의 이점이다.
어쨌든 20세기까지는 후발자의 이점이 확실히 돋보였다. 추격의 나침반을 보며 뒤?아가는 일은 그래도 수월하다. 다른 나라의 경험을 전수 받을 수 있고 시행착오를 미리 피할 수도 있다. 산업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수확체감의 법칙이 작용하는 한, 얼마든지 선발자와 격차를 줄여나갈 수 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후발자의 이점보다는 선발자의 이점이 확연히 드러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고 수확체감이 아니라 수확체증의 법칙이 작용하면서의 일이다. 디지털 경제와 융합기술의 혁명으로 초래된 일이기도 하다. 많은 나라가 세계표준의 선점에 경쟁적으로 나서는 것도 바로 이 선발자의 이점을 구현하기 위한 전략의 하나다.
언뜻 보면 브릭스(BRICs)를 비롯한 후발국들의 약진이 돋보이는 것 같아도 사실은 그렇지 않다. 역동적인 후발국일수록 추격하는 데 머물 나라는 하나도 없다. 어느 분야에서건 선발자의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면 영원히 후발국을 면하지 못한다. 선발자의 이점이 강조될수록 추격이 쉽지 않을 뿐더러 반대로 격차가 더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우리에게 과연 돌파구는 없는 것인가. 선발자의 이점을 누리려면 시간을 먼저 잡는 일이 긴요하다. 인재양성ㆍ기술개발ㆍ지식창출ㆍ문화창조ㆍ국가 및 기업 경영의 혁신을 남보다, 다른 나라보다 먼저 서두르자는 것이다. 21세기의 패러다임을 선도적으로 형성해 나가자는 의미이다. 앨빈 토플러가 강조했듯이 시간은 이제 경쟁력을 창출하는 중요한 원천 가운데 하나이다. 뒤따라가는 방식으로는 결코 선진국에 도달할 수 없다.
그러나 앞선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나침반을 스스로 만들어야 하는 입장에서는 어떤 길을 가더라도 확실하지가 않다. 한 치 앞이 안 보이는데도 선발자의 이점을 선점하려는 경쟁은 치열하다. 경제규모가 커갈수록, 글로벌 기업으로 위상이 오를수록 탄탄대로보다는 장애물을 각오해야 한다.
올해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2만달러의 시대를 맞는다. 선진국의 문턱쯤 왔을까 하고 한숨 돌려보지만 아직 갈 길은 멀다. 4만달러 이상의 소득수준은 돼야 선진국 명함을 내밀 수 있고 최 선진국들은 이미 7만달러 시대를 열었다. 분명한 것은 앞서지 않고서는 ‘선진’이라고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여기 우리의 선택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