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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말, 영국항공은 유가 폭등과 경쟁업체의 난립으로 불황의 늪에 빠져 있었다. 변화가 절실했다. 영국항공은 '탠저린'에 의뢰했다.
작은 감귤 이름을 사명(社名)으로 가진 탠저린은 센트럴세인트마틴즈 예술대학 출신의 두 디자이너가 런던 외곽에서 창업한 디자인 컨설팅 기업으로, 국내에는 다소 낯설지만 25년의 역사를 지난 디자인 명가로 통한다.
애플의 아이폰 디자인을 총괄하고 있는 조너선 아이브 수석부사장이 탠저린 출신이고, 올 초 삼성그룹이 디자인경영센터의 글로벌디자인 팀장으로 새롭게 영입해 뜨거운 관심을 받은 주인공이 바로 이돈태 전 탠저린 공동대표였다.
영국항공은 탠저린에 비즈니스 좌석을 새롭게 디자인해 달라고 했다. 이 프로젝트는 비즈니스석을 이용하는 승객의 심리 뿐 아니라 여객기의 제한적인 상황을 이해해야 하는 작업이었다. 디자이너들은 일자(一字)로 줄 맞춰 늘어서 있는 좌석 형태에 의문을 갖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아예 직접 비행기에 올라 좌석의 상태를 체험하기도 했다.
고심 끝에 탠저린이 대답을 내놓았다. "모든 승객이 비행기 앞 쪽을 바라보는 것에서 탈피해 한 쌍의 침대가 앞 뒤로 마주보는 형태"였다. 음양의 조화에서 착안한 영국항공의 좌석 디자인은 흡사 태극 문양을 닮았다. 고정적이었던 여객기 내부공간은 창의적으로 바뀌었고 승객은 더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을 얻었다. 좌석 디자인 변경을 위해 경영난 속에서 수백만 파운드를 투자한 영국항공은 '음양 좌석'을 도입한 지 채 일 년이 지나지 않아 투자 수익을 거두기 시작했고 매출은 연평균 8,000억 원 이상 늘어났다. 특허를 받은 이 좌석 디자인은 항공기 좌석의 판도 자체를 바꿔 놓았다.
탠저린의 창사 25주년에 맞춰 나온 이 책은 그간 진행한 대표적 프로젝트 25가지를 연도 순으로 정리해 탠저린의 철학과 저력을 보여준다.
직원이 고작 20 여명에 불과한 작은 기업이 화웨이, 토요타 등 세계 유수의 기업을 비롯해 삼성전자, LG전자, 아모레퍼시픽 등 다양한 기업들과 협업한 과정들 속에서 '창조경제'의 롤모델을 찾을 수 있다. 몸이 불편한 사람들을 위해 고안된 의료장비에 고급스러우면서도 매끈한 디자인을 선사한 '액티브 보행보조기 디자인'은 장애인 보조장치에 대한 인식까지도 바꿔놓았다.
네덜란드 침대 제조업체 아우핑의 의뢰를 받았을 때는 유럽인들의 침대 사용 습관을 국가별 선호도로 분석해 소비자 맞춤형 차별 전략을 개발했다. IT 대기업 시스코와 유엔에는 화상 회의 시스템을 이용해 전 세계의 다양한 그룹이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는 '다이얼로그 카페' 프로젝트를 제공했다. 탠저린의 디자이너들은 기술적 한계 앞에서도 주저하지 않았고 "디자인이 기술에 영향을 미칠 수 있고 또 실제 효과도 있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겸손하게 질문하고, 주요 사용자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아이디어의 잠재성을 활용할 것. 비즈니스의 틈새를 공략하고 스토리텔링을 확보하며 최선의 해결책을 제공할 것. 탠저린의 전략은 디자인에 관한 조언일 뿐 아니라 인생의 지침이 될 만하다. 3만5,000원.
/조상인기자 ccsi@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