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자는 '최악의 악몽'이라는 표현을 썼다. 가깝게는 SK텔레콤의 통신장애부터, 카드·이통사의 개인정보 유출, 여기에 지난해부터 꼬리에 꼬리를 물고터진 총수 구속에다 유해가스 유출 등 각종 사고를 빗대 말한 것이다. 아니 그 이상일지 모른다. 지난해부터 위기를 겪은 기업과 업종을 꼽아보면 전분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 말이다. '어느 기업이든 리스크(위기)는 반드시 찾아온다'고 하지만 현재의 동시다발적 위기는 한국 경영학사의 한 장을 장식해나가고 있다.
사태의 심각성은 리스크 유형이 다양해지는 가운데 언제·어디서·어떻게 나타나고 전파될지 모른다는 점이다. 국내에서 벌어진 작은 위기가 해외영업의 큰 손실로 이어지고 해외법인의 사소한 불법 행위가 국내 본사를 위태롭게 하는 위기의 '나비 효과'가 그중 하나다. 한마디로 과거와 달리 위기 컨트롤이 불가능해지고 있다는 표현이 정답인 것 같다. 삼성·현대차·SK·LG 등 막강한 국내외 네트워크를 가진 내로라하는 우리 대표기업들 역시 예외는 아니다.
통제 불가능 수준으로 치닫고 있는 리스크 관리를 위해 기업들 역시 시스템 정비에 한창이다. 조직과 전문인력을 키우고 상시 위기관리 시스템을 새롭게 만드는 등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가지 짚고 넘어갈 것은 현재의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재정비가 하드웨어에 주로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점. 본질은 소프트웨어의 점검과 재정비인데 이 점에서 몇 가지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우선 위기의 징후가 발견됐을 때 이를 판단하고 분석하는 과정이다. 통상 이상징후가 감지되면 최고경영자(CEO) 등이 주축이 돼 해당 관련 부서와 법무·홍보 등 여러 파트가 모여 회의를 하게 된다. 해당 부서야 있는 사실 그대로 보고할 것이 뻔하다. 법무·홍보 등 다른 부서들이 이를 듣고 위기의 수준을 판단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법무적인 시각에 치우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점이다. 하청업체의 과실로 문제가 생겼다고 했을 때 법률적 시각에서 보면 원청업체는 문제가 없을 수 있다. 법률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판단되면 위기 징후가 나타났을 때 과소평가하기 쉽다.
하지만 위기는 법을 어기지 않았다 해도 확대 재생산된다. 당시의 정치적·사회적 상황과 그리고 대기업의 도덕적 책임 등 여러 변수로 인해 법과는 무관하게 움직이는 경우가 현실이다. 그래서 위기 징후가 발견됐을 때 정무적 시각에서 바라보고 판단하려고 노력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정무적 시각을 무시한 채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며 위기 징후를 등안시하게 되면 더 큰 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가스 유출, 총수 구속, 개인정보 유출 등 일련의 위기 상황에서 대다수 기업들이 초기 위기 징후 감지시 법적인 판단에 너무 의존했다는 후문이다. 법률적 시각에서 '구속 수사 대상이 아니다' '관련 법을 어기지 않았다' 등의 판단이 앞섰다. 변호사들로 구성된 법무팀의 전문지식 앞에서 정무적인 판단은 쓸데없는 소리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았다. 이 이면에는 많은 기업들이 정도경영을 강화하겠다며 법무팀 산하로 홍보 등 정무 기능을 넣은 것도 작용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덧붙여 사소한 위기라고 판단되도 항상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한다는 점이다. 한 예로 해외 모 기업은 리스크 위원회에서 10명 중 9명이 낮은 레벨의 위기로 판단했어도 1명은 이에 상관없이 의무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토록 하고 있다. 의무적으로 지명받은 1인은 남들이 위기가 아니라고 할 때, '최악의 상황이다'고 주장해야 한다. 그는 이번 위기가 회사에 치명적 위협을 가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이에 맞춰 대응방안을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사소한 위기가 확산됐을 때 당황하지 않고 대응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놓는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바꿀 수 있는 방안도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위기를 역으로 이용하면 더 큰 신뢰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예로 위기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고 끝내면 더 이상의 발전은 없다. 이때쯤 CEO가 나서 위기를 통해 더욱 한 단계 발전하는 내용을 담은 마스터플랜을 제시한다면 시장은 그것을 기억할 것이다. 리스크 커뮤니케이션 재정비에서 소프트웨어의 개선 없는 하드웨어의 기능확대는 덩치만 키우는 역효과를 양산할 가능성이 농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