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문 입구를 들어서자 시야에 들어온 것은 상자갑처럼 늘어선 자동화기기와 무미건조한 창구가 아니라, 현대적인 팝 아트를 이용한 포스터들이다. 그것도 미관상 용도로 구석에 한두 점 걸린 것이 아니라, 상당한 공간을 차지하며 수십장이 버젓이 「전시」돼 있다.전시는 1년에 두 종류를 번갈아가며 벌인다. 주로 상반기에는 가벼운 포스터 종류, 하반기에는 고전적이고 품격이 높은 정통 회화. 은행 고객뿐 아니라 취리히 시민들이 편히 둘러볼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영업점에 들어서기 전 로비에 설치돼 있다.
맞은편 한 구석에 자리잡은 빈 공간에는 국내 은행에는 안 보이는 기계가 설치돼 있다. 동전 교환기다. 크레디스위스그룹 대변인인 안드레 슈가씨는 『얼마 전까지만해도 창구 직원이 하던 동전 교환을 기계가 대신하게 돼 공간이 비게 됐다』며, 『넓지 않은 공간이지만 고객과 시민들을 위한 카페로 개조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직원들이 처리하던 일을 기계나 전산망이 해결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공간 활용의 여지가 커졌다는게 그의 설명이다. 전산화가 진행될수록 생활은 질적으로 윤택해진다는 것이다.
사진을 찍겠다고 요청하자, 슈가 대변인은 고객이 한 명도 안 보일 때까지 기다린 후에야 OK 사인을 냈다. 은행을 찾은 고객의 얼굴을 함부로 찍게 할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영업점 문을 나서 전경으로 바라보니, 100년도 전에 지어졌다는 크레디스위스그룹 본사 건물은 세계적인 유니버셜 뱅킹의 본채라고 하기에는 작고 낡았다. 그래도 내부는 현대적이다.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외부는 옛 모습 그대로 유지하고 내부만 초현대식으로 개·보수하는 유럽 건물의 전형에서도 첨단 전산 기기와 문화공간의 공존을 엿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