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연방준비제도(Fedㆍ연준)가 양적완화를 조기에 축소할 것이라는 관측이 중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의 경기부진과 맞물리면서 인도부터 남아프리카공화국에 이르는 전세계 신흥국 통화가치가 줄줄이 급락하고 있다. 당분간 통화하락세가 이어질 것으로 전망되는 가운데 올 들어 대거 발행된 아시아 신흥국의 회사채 투자가 손실을 낳을 가능성마저 제기되며 신흥국으로부터의 자금이탈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우려된다.
11일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인도 루피화는 이틀 연속 역대 최저치를 갈아치우며 급락세를 이어가고 있다. 루피화 가치는 10일(현지시간) 오후 외환시장에서 달러당 58.15루피로 사상 최저치를 기록한 데 이어 11일 58.95루피(정오 현재)까지 떨어져 최저치를 경신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중기적으로 달러당 60루피선도 붕괴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인도 외환어드바이저스의 압히세크 고엔카는 "앞으로 3~6개월 루피화 가치는 일시 반등했다가 달러당 60루피까지 떨어질 것"이라며 "루피화는 높은 수준의 경상적자 규모에 걸맞은 현실적인 선을 찾아가야 한다"고 지적했다.
루피화는 최근 미 국채금리 상승으로 인도와 미국 간 금리차이가 1%포인트가량 줄면서 해외자금이 빠르게 유출돼 지난달 이후에만도 달러화 대비 통화가치가 7.5%가량 떨어진 상태다. 인도증권거래위원회는 올 들어 지난달까지 인도 채권시장에 45억달러가 순유입된 반면 이달 들어서만 약 16억달러가 순유출됐다고 집계했다.
상황은 다른 신흥국시장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인도만큼 급격하지는 않지만 타이 밧화는 지난달 이후 5.1%, 필리핀 페소화는 4%의 낙폭을 각각 보이고 있다. 인도네시아는 11일 달러당 1만루피아가 붕괴되며 환율방어에 비상이 걸린 상태다.
WSJ은 고금리 신흥시장으로의 자금유입을 야기했던 연준의 양적완화가 축소될 것이라는 전망에다 중국 등 아시아 각국의 경기회복세 둔화가 신흥국의 자금 엑소더스를 부추기고 있다고 분석했다. 특히 중국의 부진한 지표가 발표된 직후인 10일 금을 비롯한 상품 수출국인 남아공의 랜드화 가치는 하루 동안 무려 2.2%나 폭락해 2009년 3월 이래 최저치를 기록했다. 원자재 수출국인 호주 달러화도 11일 지난 2010년 10월 이래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날 세계 최대 채권펀드 운용사인 핌코도 신흥국 자금이탈을 부추기는 경고를 내놓았다.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핌코는 고금리의 아시아 정크(투자부적격) 등급 채권 투자가 손실을 초래할 수 있다면서 투자자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올 들어 선진국들의 양적완화에 힘입어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서 발행된 정크본드는 전년동기 대비 3배에 육박하는 192억달러에 달한다. 하지만 앞으로 연준의 양적완화가 줄어들 수 있는데다 중국의 성장동력도 예상보다 빠르게 약화하면서 리스크 자산에 대한 투자자의 관심도 약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 5일까지 일주일 동안 정크본드에 투자하는 하이일드펀드에서 무려 60억달러 이상이 빠져나가는 등 일부 투자자들은 이미 리스크 자산에서 발을 빼고 있다. 핌코의 마사나오 도모야 일본 투자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성장이 둔화하면 투자등급이 높은 채권의 선호도가 높아진다"며 "그동안 순전히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에 힘입어 인기를 누렸던 리스크 자산에 대한 관심을 거둘 때"라고 설명했다.
캐피털이코노믹스는 10일 보고서에서 "많은 신흥국의 통화가치 하락이 이미 상당 수준 진전됐고 일부는 연간 전망치보다도 평가절하된 상태"라며 "올해 말 반등 가능성도 배제하지는 않지만 추가 하락에 비중을 두고 있다"고 경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