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은 경기 파주 조리읍이다. 북쪽으로 차로 10분여 가면 비무장지대(DMZ) 인근에 출판단지로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48만평 규모의 파주출판도시가 나온다. 200여개 출판사에 최근에는 영상·영화사 입주도 시작돼 종합예술단지로 거듭나고 있다. 주말이면 종종 아이들을 데리고 이곳을 찾아 이 출판사, 저 출판사 책방을 돌아다니며 동화책·소설·인문학 등 눈길 닿는 대로 책을 집어든다. 향긋한 풀 내음과 수목 사이사이로 옹기종기 들어선 출판사들은 1층에 열린 도서 공간을 갖고 있어 언제 어디서든 시간에 구애 없이 걸터앉아 독서를 즐길 수 있다. 어른들은 물론 아이들이 도란도란 모여 앉아 책을 읽는 모습이 여간 정겹지 않다.
어디로 가는지 모를 정도로 바쁘고 각박한 자본주의 경쟁의 일상에서 주말의 이 소중한 시간은 인생의 오아시스요 나침반이다. 하지만 이 같은 호사(?)를 우리 국민 중 몇 명이나 누리고 있나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다. 첨단 이기인 인터넷과 시장 효율성에 밀려 전국의 지역 서점은 씨가 말라가고 있다. 동네에 서점이 있다 해도 죄다 참고서 일색이다. 이런 토양에서 인문학적 성찰이 이뤄질 리 만무하다. 얼마 전 대학입학시험인 수능이 끝났다. 중고등학교, 아니 초등학교 때부터 입시 내신성적에 내몰리며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꿈이 어떤 것인지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고3 수험생들. 수능을 잘 봐 세칭 좋은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서 인생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압축성장 기존 패러다임 한계
졸업 후 취직이 힘들어 이태백(이십대 태반이 백수)이요, 3포세대(연애·결혼·출산 포기)라는 자조 섞인 조어가 등장한 지도 오래다.
그래도 불나방처럼 목숨이 달려 있는 것처럼 대학 입시에 올인한다. 어디 입시뿐이랴. 우리는 시대가 바뀌었는데도 과거의 성공 방정식에 매여 맹목적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한국은 전쟁의 폐허에서 수십 년간 압축성장한 성공한 패스트 팔로어로 자리매김했다. 과거는 일사불란한 전진, 베끼기식 돌격, 상명하복, 복종하고 순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 시대였다.
하지만 기존의 사고방식과 패러다임이 한계에 도달했고 그 파열음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저성장·저출산으로 인구가 줄어 절대 주택 수요층이 줄고 있는데 과거처럼 정부가 부동산발 집값 띄우기 경기부양책을 내놓았지만 수 개월도 채 안돼 실효성 없음이 드러나고 있다. 모던을 넘어 포스트모던으로 나가는 세계 시대사조가 무색하게 한반도는 분단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구태의연한 좌우 이념 갈등을 그대로 노정하고 있다. 대북 삐라를 놓고 벌어지는 소동이 그 예다. 남북 평화와 교류에 힘을 쏟았던 노무현 정부 시기에 가장 자유롭게 대북 전단을 뿌릴 수 있었다는 한 대북 활동가의 말은 역설적이다.
이 같은 혼돈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이제 패스트 팔로어가 아니라 퍼스트 무버가 돼야 한다. 하지만 이것은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인 만큼 지난하고 힘든 과정이다. 역사의 고비 고비마다 새로운 지평과 패러다임을 여는 토양 역할을 했던 인문이 중요한 이유다. 최진석 서강대 철학과 교수는 인문을 '인간이 그리는 무늬'라는 시적 용어로 표현했다.
느리게 가야 새 지평 보여
왜 스티브 잡스 같은 창조적 인재, 구글 같은 창의적 기업문화가 안 나오냐고 닥달할 것이 아니다. 사회 전체의 문화적·과학적·정치적 수준이 총체적으로 업그레이드돼야 하는 것이다.
하루 수억 건의 스마트폰 단문, SNS 메시지는 표피적이고 지엽 말단적이기 쉽다. 사회 문제를 놓고 깊이 없이 분열과 갈등만 초래할 공산이 크다.
혜민 스님의 말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까지는 아니더라도 느려야 우리는 길을 볼 수 있다. 그 첫걸음으로 전 국민적 책 읽기 운동을 벌이면 어떨까. 파주출판단지는 가정마다 만 권의 책을 비치하는 운동을 개시한다고 한다. 그것까지는 아니더라도 가정마다 TV가 독점하는 거실을 작은 도서관으로 바꾸는 운동을 하는 것은 어떨까. /yhlee@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