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에] 안녕들 하십니까

짊어진 삶의 무게에 분노도 침묵으로 삭였던
아들과 딸·부모가 던진 현실에의 원초적 질문
이젠 누구라도 나서서 답을 줘야 하지 않겠나


16대 대통령선거가 막바지로 치닫던 2002년 12월10일. 노무현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와 한나라당 이회창,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TV토론에서 맞붙었다. 초점은 단연 노무현·이회창 두 후보 간 대결. 하지만 정작 토론회는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았던 권 후보에게 승리를 안겨줬다. "국민 여러분, 지금 행복하십니까. 살림살이 좀 나아졌습니까"라는 그의 한마디는 선거에서 95만표를 가져왔다.

15대 대선 때 30만표 밖에 얻지 못했던 권 후보가 5년 후 무려 3배가 넘는 지지자를 끌어모은 것은 그의 이념적 성향 때문이 아니었다. 단순하지만 서민의 아픔을 꿰뚫는 물음이 깊은 공감을 얻었기에 가능했다. 국제통화기금(IMF) 체제에서 조기 졸업하고 경제발전도 이뤘지만 갈수록 팍팍해지는 삶의 무게를 반영한 말 한마디의 무서움이다.

11년이 지난 지금 또 하나의 바람이 불고 있다. 이번에는 선거판이 아니라 잠잠했던 학원가에서다. 고려대생이 남긴 2장짜리 대자보. 제목도 일상생활에서 무심코 쓰는 인사 '안녕들 하십니까'인 평범한 듯한 글은 그러나 이제 대학을 넘어 고등학교로, 정치권으로, 노인과 가정주부로 심지어 연예계까지 휩쓰는 태풍이 됐다. 과연 최근 십년간 대학과 사회에서 이보다 활발한 물음과 답변이 있었는가 싶다.

대자보를 쓴 주인공이 어느 당 소속인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철도 파업과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같은 현안에 어떤 입장을 보였는가에 시비를 거는 것도 문제의 본질과는 거리가 있다. 출발은 대학생이 했지만 이제는 사회 각계각층이 참여해 정치 현안뿐만 아니라 우리 일상의 모든 문제를 다루는 내용으로 확대 재생산됐다. '안녕들 하십니까'가 고려대 4학생만의 것이 아니라 모두의 질문이 됐는데 시작을 누가 하고 사상적 편향이 어떤지가 무슨 대수랴.

혹자는 말한다. 청년 실업과 미래 불안을 표출한 대학생의 치기 어린 행동에 불과하다고. 과연 이 질문이 젊은이만의 것일까. 그동안 삶의 굴레에 분노조차 침묵으로 삭였던 퇴직자가, 또 가정주부가 '나는 안녕하지 않다'고 외치는 것을 한때의 반항으로 봐야 하나.

박근혜 대통령은 당선 직후 첫 일성으로 국민 행복시대를 열겠다고 약속했다. 1년이 지난 현재 자신이 안녕하다고 느끼는 이가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친구와 희망조차 버리고 12년간 대학만 바라봤건만 졸업 후 직장 문턱을 넘지 못한 백수가 수십만명이요, 겨우 일자리를 구하고 빚을 내 집을 사니 하우스푸어로 내몰린 게 중장년의 오늘이다. 노년이 돼 문뜩 눈 들어봐도 보이는 건 턱없이 부족한 연금과 불안한 노후뿐. 과거·현재·미래, 그 어느 순간에도 안녕할 수 없는 것들 천지다.

숨 막히는 게 어디 이뿐이랴. 우리는 항상 둘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당하며 살아왔다.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복지 논쟁, 이석기 사태 그리고 최근의 철도노조 파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선택은 지지 아니면 반대 둘 중 하나였다. 정치가 사라지고 '옳고 그름'만 가리는 대립의 현실에서 '다름'은 낄 자리를 찾지 못했다. 학교 시험도 최소 사지선다로 풀건만 항상 현실은 OX 문제만 강요할 뿐이다. 그래서 '안녕들 하십니까'는 '이건 아니지 않소'라고 되묻는 서민들의 외침일 수밖에 없다.

행복하지 않은 삶, 소통 없는 정치, 극단으로 나뉜 사회, 이 모든 게 우리를 안녕하지 않게 하는 현실을 마냥 두고 볼 수는 없다. 그래서 대학·고등학교 담벼락과 소셜네트워크 서비스(SNS)에는 아직도 '안녕들 하십니까'의 질문이 쏟아진다. 이제 답이 나올 차례다. 아들과 딸, 남편과 아내, 아버지·어머니가 던지는 현실에의 원초적 질문에 누군가는 나서서 대답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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