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화로 일군 도전·개척 60년] <3> 플라스틱을 만들어 보자

"생활용품 만드는게 애국" 화학산업 도전…53년 빨간색 빗 첫 생산
안깨지는 미군 화장품 뚜껑 보고 진출 결심
57년 국내 첫 공채실시 인재경영 첫발 디뎌


“안 깨지는 뚜껑 좀 만들어낼 수 없나.” 연암 구인회 사장의 눈썹이 삼각형으로 곤두섰다. 언짢은 일이 있을 때마다 나오는 버릇이다. 새로 선보인 ‘럭희크림’의 주문이 쏟아졌지만 정작 상품을 보냈더니 화장품 용기 뚜껑이 다 깨졌다. 도매상들의 거센 항의가 빗발친 것은 당연한 결과. 연암의 동생인 구태회 전무가 장충동집 마당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베이클라이트(합성수지)를 녹이며 수없이 실험을 되풀이한 것이 그때였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는 말처럼 연암이 용기 뚜껑에 대해 가졌던 불만은 훗날 LG화학이라는 거대 석유화학기업을 만드는 토대가 됐다. “우리 플라스틱 한번 만들어보자.” LG가 화학산업에 눈을 돌린 시점은 지난 51년 봄.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우연히 미군 PX에서 흘러나온 화장품 뚜껑을 살피던 연암은 ‘PLASTIC’을 처음 보고 “바로 이거다”라며 무릎을 쳤다. 우려하는 목소리도 만만찮았다. 전쟁의 상흔이 깊어만지던 때 아무리 장래성 있어 보이는 사업이라 해도 가진 것 모두를 털어넣기에는 위험이 너무 컸다. 당시 연암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게(플라스틱 사업이) 진짜 사업이다. (전쟁 중에도) 국민의 생활용품을 차질 없이 만들어내는 기 애국이다. 니들 생각은 어떻노.” 기업인 구인회의 진면목이다. 53년 8월. 미국산 사출성형기ㆍ금형ㆍ원료 등을 확보한 동양전기화학공업사(LG화학의 전신)는 하루에 350개 정도의 빨간색 플라스틱 빗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빗이 부산국제시장으로 넘어가면 이것을 먼저 받기 위해 새벽마다 줄을 서는 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단다. 빗에 이어 비눗갑과 칫솔을 만들던 시절 범일동 공장에는 두 사람이 밤잠을 설쳤다. 구자경 상무와 고(故) 허학구(허전수 새로닉스 회장의 부친) 전무가 주인공. 말이 상무고 전무지 얼굴에 기름때를 묻히고 새벽잠을 설치는 공장 막일꾼이나 다름없었다. 훗날 애지중지하는 장남을 왜 그리 고생시켰냐는 질문에 연암은 “귀여운 자식에게 한대를 더 주는 거 아니요”라고 답했다. 플라스틱 산업의 문을 연 연암이 기업 규모가 커지면서 처음 시작한 것이 사람에 대한 투자였다. 서울 반도호텔에 사무실을 열 당시 연암은 부산대학교를 졸업하고 멀쩡하게 조선통운에 다니던 허신구 현 GS리테일 명예회장을 불러들였다. 장사에 문외한이라던 허 명예회장에게 연암은 이렇게 말했다. “보래. 서부활극 봤제? 아무도 안 사는 땅에 먼저 가서 말뚝 박고 말도 기르고 씨 뿌리는 사람이 안 이기드나. 니가 카우보이보다 못할 기 뭐 있노. 내일 저녁 물건 갖고 올라가게.” 기업인 구인회의 사람 욕심이 드러나는 대목이다. 57년 봄. LG화학은 국내 기업 최초로 공개채용을 실시했다. 지연ㆍ학연 등을 무시하고 신문에 낸 채용 공고는 당시 사회에 충격이었다. 채용된 7명은 아무런 사전교육도 없이 곧바로 현업에 배치됐다. “밑바닥부터 일해야 프로가 될 수 있다”는 연암의 신념에 따른 것이다. ‘LG 인재경영’의 막이 올라가는 순간이다. LG가 비닐장판 등 플라스틱 제품을 집중적으로 생산했던 곳은 부산 연지동 공장. 당시 럭키화학이 플라스틱 빗에서 PVC 파이프, 비닐장판으로 품목을 넓혀가며 화학과 전자산업의 토대를 다지던 곳이다. 신년 초 기자가 찾은 연지동 공장터는 ‘LG 부산청소년과학관’으로 변신해 어린이들에게 과학에 대한 꿈을 키워주는 곳이 돼 있었다. 앞선 시대를 그려보던 연암의 꿈이 초롱초롱한 아이들의 꿈으로 이어지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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