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10월1일은 중국 건국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1949년 10월1일 오후3시 북경 천안문 위에서 마우쩌둥(毛澤東) 주석이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성립했다』고 선포하자 광장에 모인 수십만의 관중은 환성을 지르고 54문의 대포에선 예포가 울려퍼졌다.지금도 천안문엔 마우쩌둥의 천연색 초상화가 사시사철 걸려있고 광장 끝엔 마우쩌둥 기념관이 있다. 중국에선 국부(國父)로서 마우쩌둥을 깍듯이 모신다. 그러나 사석에선 저우언라이(周恩來) 수상에게 더 친근감을 나타낸다.
몇년 전 신화서(新華社) 통신에 갔을 때 周수상은 정말 대단한 분이었다.『 큰일이 있을 때 그 분께 담화문 같은 것을 올리면 고쳐내려 오는데 간결 정확한 것이 한 자도 버릴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다.
사실 공산주의 혁명으로 신생 중국을 탄생시킬 때까지 이상형의 혁명가인 毛 주석과 실무형의 조정자인 周수상의 콤비 플레이는 절묘했다. 그래서 중국 사람들은 毛를 엄한 아버지로 周를 자상한 어머니로 비유한다. 그 사이에서 중국이라는 나라가 태어났다는 것이다.
문제는 건국에 성공하고 나서 생겼다. 건국 후 당과 군의 실권을 한손에 쥔 毛는 차츰 황제적 위치로 올라갔다. 그러나 周는 처음엔 재상(宰相)이었다가 차츰 집사(執事)적 지위로 내려갔다. 어쩔 수 없는 권력의 속성인가 보다.
毛주석이 영구혁명을 외치며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 등 여러 무리수를 강행할 때 周수상은 중간에서 무척 애를 쓰며 차츰 자신의 무력함을 실감하게 됐다.
문화혁명 땐 국가원로들과 종교지도자·지식인을 구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했으나 미친 물결을 막지는 못했다.
홍위병 소동으로 얼마나 속을 끓였던지 周수상은 암에 걸려 76년 1월 7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마지막 수술을 받을 때도 毛의 허가를 받아야 했다. 무덤조차 못 쓰고 화장한 재는 산하에 뿌려졌다. 제 2인자의 한계요, 운명인지 모른다.
지금도 중국에선 周에 대한 추모의 열기는 대단하다. 그렇다고 국부인 毛의 우상을 결코 깨진 않는다. 중국 사람들은 마우쩌둥을 중국의 귀중한 브랜드로여기며 신화의 영역에 모셔두고 있다. 거기에 중국 사람들의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