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가 "일본, 양적완화 덫에 걸릴 수 있다"

예상보다 장기화 가능성에 "국채금리 치솟을 것" 경고
"환율에 성장 의존 안돼" 美정부도 엔화약세 견제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에 들어간 미국과 달리 출구가 전혀 보이지 않는 일본의 대규모 양적완화 부작용에 대한 경계감이 날로 고조되고 있다. 일본은행이 앞으로 수년간 테이퍼링에 돌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인 가운데 월가는 일본이 '양적완화의 덫'에 걸려들 수 있다는 경고를 내놓기 시작했다. 연준의 테이퍼링과 맞물려 가파르게 진행되는 엔화약세에 대해 미국도 견제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블룸버그통신은 16일(현지시간) 오는 21~22일의 일본은행 금융정책결정회의를 앞두고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조사 대상인 36명의 이코노미스트들 가운데 일본은행이 내년 하반기 이전에 테이퍼링에 착수할 것을 예상한 이가 단 한 명도 없었다고 전했다. 출구전략 시기를 가늠할 수 없다는 응답은 36명 가운데 15명에 달했다. JP모건체이스는 일본은행이 앞으로 4년 동안은 테이퍼링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이처럼 금융시장에서 일본의 양적완화가 장기화할 것으로 내다보는 것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 총재가 출구전략 가능성을 일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당초 목표로 잡은 소비자물가지수 2%가 달성된 후에도 물가수준이 안정되기까지 완화정책을 이어갈 것이라며 "출구전략 논의는 시기상조"라고 못박았다. 일본은행의 시나리오대로 경기와 물가수준은 회복되고 있지만 일본은행의 통화완화 정책은 당초 예상됐던 2년보다 길어질 가능성을 내비친 것이다.

하지만 일본은행이 출구전략에 대해 함구하는 기간이 길어질수록 월가에서는 부작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이코노미스트를 지냈던 리처드 구 노무라연구소 이코노미스트는 "이제는 구로다 총재가 출구전략을 생각하기 시작해야 한다"며 "출구전략이 너무 늦어지면 장기금리가 날뛰는 것을 막을 수 없게 된다"고 경고했다. 현재 일본의 10년 만기 장기국채 금리는 세계 최저 수준인 0.67% 안팎에 머물고 있다. 일본은행이 연간 국채발행액의 절반이 넘는 60조~70조엔 규모를 사들이면서 국채가격이 높은 수준에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기부양으로 물가수준이 높아진 뒤 일본은행이 출구전략에 돌입할 경우 국채금리가 급등하면서 일본의 재정 리스크가 불거질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경고했다. 구 이코노미스트는 일본은행의 대규모 부양책으로 장기금리가 걷잡을 수 없이 치솟고 경기회복세가 무너지는 등 '양적완화의 덫'에 걸려들 수 있다고 경고했다. JP모건체이스의 간노 마사아키 이코노미스트도 "아직까지는 금융완화 정책이 순항하고 있지만 유례없는 완화책에는 엄청난 위험도 도사리고 있다"고 경고했다. 그는 "일본은행이 자산매입을 줄이기 시작하면 누가 국채를 사겠냐"며 "테이퍼링이 시작되기 전에 일본 정부가 재정건전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장기 국채금리는 단숨에 2%를 뛰어넘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국 정부도 끝이 보이지 않는 일본의 양적완화 정책에 경계감을 내비치고 있다. 잭 루 미 재무장관은 16일 워싱턴DC에서 열린 한 강연에서 일본 경제가 아베노믹스에 힘입어 성과를 올리고 있다고 강조하면서도 "일본은 경제성장을 환율의 이점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며 "일본의 외환정책을 계속 주시할 것"이라고 밝혔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에 대한 전망이 확산되는 가운데 이미 테이퍼링에 돌입한 미국이 가파른 엔저를 견제하고 있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실제로 UBS 등은 최근 일본의 물가회복세에도 불구하고 아직 일본 경제가 디플레이션에서 벗어나지 못함에 따라 올해 일본은행의 추가 양적완화가 불가피하다며 이로 인해 엔화약세도 한층 더 진전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았다.

한편 일본 정부는 17일 발표한 1월 월례 경제보고에서 경기기조 판단을 '완만하게 회복 중'에서 '완만하게 회복'으로 4개월 만에 상향 조정했다. 일본 정부가 '완만하게 회복'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리먼브러더스 사태 이전인 2008년 1월 이후 6년 만이다. 일본 정부는 앞서 지난해 12월 경제보고에서 '디플레이션' 표현을 삭제한 바 있다.

일본의 신선식품을 제외한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지난해 11월 전년동월 대비 1.2%를 기록했으며 일본은행은 이달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 4월에 시작되는 2014회계연도의 물가상승률 전망치를 1.3%, 이듬해인 2015회계연도의 전망치는 목표치인 2%에 근접한 1.9%로 각각 제시할 것으로 예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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