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상황이 워낙 안 좋아 임금협상을 위한 상견례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SK에너지는 이달 초 노동조합에 임금교섭을 위한 상견례를 연기하자는 공문을 보냈다. 이유는 경영악화 탓이었다. SK에너지는 공문을 통해 3일로 예정돼 있던 상견례를 22일로 늦추고 교섭위원 규모도 축소하자고 제안했다. 사실상 협상 규모를 줄인다는 얘기다. SK그룹 관계자는 "위기 극복을 위해 노사가 힘을 합치자는 차원으로 구체적인 내용은 협의 중"이라고 말했다.
정유업계가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다. 정유업계가 어려운 게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내부 임직원들의 위기의식은 밖에서 보는 것보다 심각하다. 2·4분기에 이어 3·4분기 실적도 좋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나오면서 정유사들의 한숨이 깊어지고 있다.
주유소들의 경영난도 가중되고 있다. 지방 변두리 주유소는 아예 대출길조차 막혔다.
SK에너지의 임협 연기는 이례적인 일이다. 회사 경영사정을 들어 임단협을 미루는 경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만큼 경영상황이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을 반증한다.
직원들의 행동 방식도 예전과 크게 달라졌다. 지금까지 울산 공장에 출장이 있는 날이면 보통 저녁 자리까지 하고 다음날 올라오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최근에는 무조건 당일치기 출장으로 바뀌었다.
이는 SK에너지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에쓰오일은 전사적으로 비용 아끼기가 한창이다. 중국 상하이와 싱가포르, 암스테르담 등에 있는 해외 지사와의 출장회의는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화상회의로 대체하도록 하고 있다. 당초 전년 대비 10% 정도 늘어날 것이라고 봤던 화상회의 횟수는 현재 20% 정도까지 증가했다. 지난해에는 1,000회가량의 화상회의가 있었다.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도 퇴근 시 소등과 태양광 발전 도입 같은 에너지 절약이나 폐열회수 활용 방안 마련에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모두 비용절감을 위한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 호황을 누렸던 정유업계가 왜 이렇게 됐을까. 정유사들의 핵심 수익원인 정제마진은 계속 떨어지고 파라자일렌(PX) 같은 석유화학 제품가격도 맥을 추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올 상반기 SK에너지와 에쓰오일은 각각 1,281억원과 74억원 규모의 영업손실을 냈다. GS칼텍스는 영업이익을 103억원 내는 데 그쳤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2·4분기 정제마진은 배럴당 6.5달러 정도였는데 더 떨어져 5.3달러에 머물고 있다"고 설명했다. 중국의 경제성장률은 낮아진데 반면 자급률은 올라간 게 큰 원인이다. 주요 수출처인 중국의 수요가 줄다 보니 지난 4월 이후 지속적으로 값이 상승해 7월에는 톤당 1,421달러까지 상승했던 PX 가격도 8월 말에는 1,303달러로 하락했다. 2·4분기에 이어 3·4분기 실적 전망도 어두울 수밖에 없다. 어느 업체 할 것 없이 구조조정이 성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주유소 업계도 지옥을 맛보고 있다. 폐업할 돈이 없어 그냥 휴업하는 주유소가 급증하고 있고 은행에선 주유소라면 아예 문전박대다. 시중은행의 한 고위관계자는 "5년 전만 해도 주유소 대출은 연체가 거의 제로에 가까웠다"며 "하지만 최근에는 연체율이 계속 높아지고 있고 경매로 나오는 주유소도 생기고 있어 수익이 불안정한 지방 변두리 주유소는 아예 대출취급을 제한하고 있다"고 전했다.
정유업계의 한 관계자는 "대구는 면적 대비 주유소 숫자가 많아 리터당 평균 마진이 60원대에 불과하다"며 "카드수수료 30~40원 정도를 빼면 사실상 주유소 유지조차 어려운 실정"이라고 밝혔다.
현재 휴업 중인 주유소는 425개로 역대 최대 수준이다. 이렇다 보니 주무 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는 지난달 말 주유소 경영실태 진단 및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긴급연구용역을 발주하기에 이르렀다.
주유소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이명박 정부 때 기름 값을 잡겠다고 알뜰주유소를 만들었는데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이익이 생겼을지 모르지만 주유소 업계의 경영난은 더 악화됐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