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을 두는 사람들, 특히 아마추어 초보자들은 누구나 대마를 잡고서도 그 바둑을 패한 경험을 갖고 있다. 대마를 잡았으니 어차피 승부는 끝난 것이라고 굳게 믿고 안전 위주로 몸을 사리다가 패하는 것이다. ‘선작오십가자(先作五十家者)는 필패’라는 기훈도 비슷한 뜻을 지니고 있다. 50집이나 되는 거대한 집을 일찌감치 지어놓고서 스스로 만족하여 몸을 사리다가 패하는 것. 프로도 심리적인 경향에서는 똑같다. 대마를 잡고 나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비겁해진다. 전투보다는 타협을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묘수로 좌하귀를 일찌감치 잡은 마샤오춘. 백70까지 안전위주로 둔 끝에 거의 추월을 허용한 형편인데 본인은 아직도 많이 이겼으려니 믿고 있었다. 흑71, 73으로 한사코 실리를 벌어들이는 조훈현. 마샤오춘의 74는 흑더러 가에 하나 지키라는 주문인데 여기서 조훈현은 숙제였던 좌하귀를 77로 움직였다. 백82까지 되자 좌하귀의 흑은 완전히 숨이 끊어졌다. 마샤오춘은 이것으로 개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조훈현은 조훈현대로 내심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가로 지키는 대신 83으로 또다시 백진이 유린을 감행할 수 있는 권리가 생긴 것이다. “승부처에서 상대방의 주문을 교묘하게 무산시키며 주도권을 휘어잡는 기술은 조훈현9단이 정말로 당대 최고입니다. 동물적인 승부 후각이지요. 마샤오춘도 천재형이지만 이 바둑의 이 장면에서는 조훈현에게 완전히 압도되고 있어요. 흑83이 놓인 시점에서는 흑이 어느덧 앞서 있습니다.” 김성룡7단의 해설이었다. /노승일ㆍ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