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의 눈] 아사리판
금융부 조영훈 기자
금융부 조영훈 기자
우리 토박이말 중에 ‘아사리판’ 이라는 표현이 있다. 빼앗을 사람이 많으니 빼앗을 자와 빼앗길 자가 한데 어울려 무법천지가 된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아사리판은 본래 다양한 의견을 개진한다는 뜻에서 출발해 덕망이 높은 스님을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사리판의 모양이 겉으로 보면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워 매우 소란스럽고 무질서하기 때문에 이 같은 현장을 뜻하는 말로 변질돼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요즘 금융가를 보면 아사리판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부정 회계’로 단죄된 국민은행과 금융감독원의 싸움이 그렇고, 카드계의 공룡 비씨카드와 유통업계의 대부 이마트가 벌이고 있는 ‘수수료 전쟁’이 그렇다. 내년부터 시행될 2단계 방카슈랑스를 놓고 은행업계와 보험업계가 갈등의 수위를 높여가고 있는 ‘방카 분쟁’은 이제 걸음마 단계다.
사실 이 모든 금융권의 분쟁을 들여다보면 작은 이익을 챙기려다 큰 것을 놓치는 ‘소탐대실(小貪大失)’이 되지 않을까 우려된다. 회계파문으로 금감원은 감독기구로서의 권위가 손상되는 타격을 입었다. 감사과정에서 드러난 문건을 공개하는 해프닝이 단적으로 그것을 보여준다. 국민은행은 원하지 않는 CEO 교체라는 최악의 상황을 맞고 있다.
카드업계도 마찬가지. 카드사들은 경영 정상화에 다가섰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이미 주요한 수익원인 ‘현금서비스’의 비중은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카드분쟁으로 거대고객인 유통업계를 잃을 위기에 놓였다. 불황을 모르고 달려오던 유통업계도 ‘비씨카드 거절’ 파문이 확대되면 영업에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 상황에서 부자들까지 지갑을 닫고 있는 것이 현실인데 이들의 소비심리가 더욱 꽁꽁 얼어붙을 수밖에 없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은 자기 조직이 살아야 된다는 논리에 충실한 ‘조직 이기주의’다. 극한 대립을 상정한 상황에서는 ‘조정’이나 ‘중재’의 묘를 발휘하기 어렵다. 이기주의가 극에 달하면 “내가 상처를 입더라도 적(?)이 더 큰 타격을 입으면 된다”는 자포자기식 당위론까지 등장할 수 있다. 금융권이 ‘아사리판’에 비유되는 상황에 이른 것도 이 같은 이기주의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
금융당국과 금융기관은 파트너다. 카드사와 유통업계도 천적이 아닌 ‘공생’의 동반자다. 타협이 나오려면 일정 부분 양보의 미덕을 발휘해야 한다. 이들의 중심에는 ‘금융 소비자’가 있기 때문이다. 어느 소비자도 이 같은 극한 대립을 원하지 않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dubbcho@sed.co.kr
입력시간 : 2004-09-02 16: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