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대러시아 경제제재를 시작하면서 러시아 금융시장 혼란이 가속화하는 가운데 불똥이 독일·영국·프랑스 등 유럽 국가로 튈 조짐을 보이고 있다. 그동안 러시아 내 투자를 늘리고 사업을 확장해온 기업들의 주가가 급락하고 있다.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곳은 러시아의 2대 교역국인 독일이다. 러시아 내 투자를 늘려온 독일 철강업체 티센크루프와 지멘스·폭스바겐의 주가는 3일(현지시간) 각각 4%, 3.92%, 1.96% 급락했다. 이 여파로 독일 종합주가지수는 3.44%나 하락했다. 영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 런던증권거래소에 상장됐지만 주요 사업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서 벌이고 있는 철강업체 에브라스의 주가는 13% 폭락했으며 에너지기업 BP의 주가도 2.28% 하락했다. BP는 러시아 최대 석유기업 로스네프트의 지분 20%를 보유하고 있다.
또 러시아 자동차 시장점유율이 29%(2012년 기준)에 달하는 프랑스와 일본의 합작기업 르노닛산의 주가 역시 5.41%나 폭락했으며 프랑스 식품업체 다농과 에너지 기업 토탈의 주가도 각각 2.52%, 1.72% 하락했다. 이외에 러시아 진출을 가속화하고 있는 제너럴일렉트릭(GE)과 엑손모빌 등도 주가가 1% 내외의 하락폭을 보이는 등 불똥이 유럽을 넘어 미국으로까지 튀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유럽과 미국 기업들이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새 성장동력으로 브릭스(BRICs·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가운데 하나인 러시아를 점찍고 그동안 막대한 투자를 하는 등 러시아와의 경제연결을 강화했다. 핀란드 에너지 회사 포르툼은 오는 2016년 실적의 25%를 러시아에서 올린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으며 GE는 러시아 진출 확대로 지난해 4·4분기 러시아 매출이 18%나 급등하기도 했다. 이것이 부메랑이 된 것이다.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경제제재 카드를 꺼내들자 투자자들의 심리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다.
러시아 경제가 서방의 경제제재와는 별도로 이미 크게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서 기업들의 혼란이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러시아의 지난해 경제성장률이 1.3%로 4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한 가운데 화폐가치 하락에 따른 물가급등 우려와 외국인 투자자금 이탈 등으로 올해 경기침체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이런 가운데 러시아 중앙은행은 3일 화폐가치 하락을 막기 위해 기준금리를 7%로 1.5%포인트나 인상해 소비위축도 우려되고 있다.
러시아 금융시장 혼란은 가속화하고 있다. 러시아 종합주가지수인 MICEX 지수는 3일 10.89% 폭락했다. 이날 증발한 시가총액은 약 600억달러로 이는 소치올림픽을 위한 투자금인 510억달러를 상회하는 것이다. 이날 러시아 루블화 가치도 달러 대비 2%나 급락했다. 로이터는 러시아 중앙은행이 환 가치를 방어하기 위해 3일 하루에만 120억달러를 시중에 풀었다고 전하기도 했다.
국제 금융시장의 혼란도 계속되고 있다. 4월 인도분 서부텍사스산중질유(WTI)는 3일 2.3% 급등한 배럴당 104.92달러로 장을 마쳐 5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북해산 브렌트유 역시 1.66%나 뛰었다. 세계 주요 곡물 생산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흔들리자 국제 밀 가격은 이날 4.86%나 급등했다.
일각에서는 이 같은 혼란이 신흥국 금융위기의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테이퍼링(양적완화 축소)으로 신흥국 경제가 흔들리고 있는 가운데 국제유가와 밀 가격이 급등해 원자재의 해외 의존도가 높은 신흥국에 또 다른 악재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로이터는 "최근 유가가 상승하는 것은 유가 강세장의 시작일 수 있다"며 "이는 선진국의 경제성장을 둔화시키고 악화된 신흥국 경제에 더욱 타격을 가할 것"이라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