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산농장 정주영회장 '제2의 고향'
서산농장은 정주영 현대 창업자의 `정신'이 담겨있는 땅이다.
정 전 명예회장을 지배하는 키워드는 `자연'이다. 그가 쉴새없이 시도한 `가출'은 자연(농사)에 대한 반란이었다.
“끊없이 일해도 별 성과가 없는” 농사는 그를 도시로 향하게 했다. 어찌보면 농사는 그의 인생에서 몇안되는 실패사례다. 하지만 이 실패는 “내 마지막 직업은 농사꾼이라는 의지를 더욱 확고하게 하는 동기가 됐다”고 그는 자서전등을 통해서 밝혔다. 그의 인생은 자연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현대건설은 그 상징이다. 그러다 그는 자연과의 조화를 알게됐고, 버렸던 땅으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성공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농토의 주인'으로 `30만명이 1년동안 먹을 수 있는 쌀을 거둘 수 있는 거대한 농장의 주인'이 되어.
하지만 이제 그는 이곳을 떠나야 한다. 제2의 고향인 서산농장에서 키운 황소를 앞세워 50년간 꿈속에서 그리던 고향(강원도 통천)을 찾았지만 제2의 고향은 떠나야 한다.
아무리 바빠도 한달에 한 두번은 이 농장을 들러 농작물 작황상태와 소 사육 상황을 점검하고, 단 한평의 땅도 놀리지 않았던 농군의 옷을 벗어야 한다.
99년 3월 동아건설이 조성한 김포매립지가 매각될 때도 "서산농장은 절대농지로서 농사를 지어야 한다"며 `마지막 직업'이 농군임을 강조했던 모습을 보기도 어려워 보인다.
마지막 직업을 농군으로 택하고, 그것을 위해 거대한 농토를 만들었던 정 전 명예회장의 뜻도 급변하는 경영환경과 그것을 수용하지 못한 현대의 위기앞에서는 힘을 잃고 말았다.
◇서산농장=가장 큰 특징은 크다는 것. 3,122만평으로 서울 여의도의 30배, 남한 전체면적의 1,0000분의 1이나 된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농토다.
전 정 명예회장이 이 농장의 구상에 나선 것은 지난 77년. 농지가 절대 부족한 실정에서 미간기업의 간척사업이 필요하다는 정부의 뜻과 맞아 떨어졌다. 79년정부는 서산 간척단지의 매립허가를 내줬다.
이 곳은 조석간만의 차가 심할 뿐아니라 썰물때는 물살이 거세 방조제공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알려진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2년 4월 공사가 본격 착수됐다. 12만명의 연인원과 150대의 대형 덤프트럭이 동원돼 석재 75만㎥, 성토 흙과 돌 1백14만㎥가 동원돼 82년 10월 B지구(1천200만평)의 방조제(1천228m)가, 84년 3월 서산 A지구(1천900만평)의 방조제(6천476m)가 각각 완공됐다.
A지구 방조제 건설에서 도입한 `유조선 공법'은 정 전 명예회장의 아이디어. 폐유조선으로 물막이 공사를 끝낸 것.
이를통해 현대건설은 280억원의 공사비를 줄였고, 공기를 당초 계획했던 45개월에서 9개월로 무려 36개월이나 단축시켜 세계 유력신문에 대서특필되기도 했다.
이후 내부 개답작업을 거쳐 86년부터 시험영농이 시작됐다. 지난해 25만8,000가마의 쌀을 수확했고, 11월 현재 1,300여마리의 소가 사육되고 있다. 정 전 명예회장은 망향의 한을 담아 98년 6월에 이 농장에서 키운 통일소 500마리, 같은 해 10월에501마리, 금년 8월에 500마리를 북한에 보내기도 했다
입력시간 2000/11/03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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