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양복이라고는 미군복을 염색한 것뿐이었고 이른바 마카오 복지는 한 벌에 웬만한 봉급생활자 월급 석 달분이 넘었다. 외제 못지않은 값싸고 질 좋은 복지를 생산해 국민 모두가 손쉽게 양복을 입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었다."
고(故)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호암자전'에 나오는 한 대목으로 제일모직의 건립 취지를 설명한 부분이다. 제일모직은 지난 1954년 9월 설립된 회사로 제일제당·삼성물산과 함께 삼성그룹의 모태기업으로 꼽힌다. 실제 삼성은 이 세 기업에서 마련한 자금으로 삼성전자와 호텔신라·삼성전기·삼성항공을 차례로 설립했다. 삼성그룹 입장에서 그 의미가 남다를 수밖에 없는 기업이다. 실제 이병철 선대 회장이 유일하게 대표이사를 지낸 계열사가 바로 제일모직이었다.
특히 제일모직 설립부터 삼성SDI와의 이번 합병에 이르는 과정은 △산업보국을 이루려던 이 선대 회장의 기업철학 △마누라만 빼고 다 바꾸라는 이건희 회장의 신경영 △한계를 돌파하라는 최근의 마하경영에 이르기까지 삼성의 경영철학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창업 초기 직물회사였지만 그동안 업력만큼이나 다양한 사업을 추진해왔다. 1970년대 패션 사업으로 영역을 확장한 후 1980년대에는 합성수지 등 케미컬 분야로 사업을 다각화했으며 1990년 들어서는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소재를 생산하는 전자재료 사업에 진출했다. 2000년에는 섬유에서 화학으로 사업 분류를 바꿨다. 이후 2012년에는 회사 전체의 매출액 가운데 소재 사업이 70%를 차지하는 등 사업변신의 성과를 냈다.
특히 지난해부터는 소재 사업을 대폭 강화하며 지난해 10월 독일의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기업인 노발레드를 인수하기도 했다. 지난해 말 모태 사업인 패션 사업을 에버랜드로 양도했다. 이후 설립 60주년을 맞은 올해 삼성SDI에 흡수합병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