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士林의 추억

김인영 <금융부장>

조선조 초기는 쿠데타와 혁명으로 날을 지샜다. 이성계가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열었고 그의 아들 이방원은 두 차례의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았으며 수양대군은 힘으로 조카를 몰아내고 왕이 됐다. 그 와중에 권력을 잡은 사대부(훈구파)는 벼슬과 부를 장악했고 밀려난 선비들(사림파)은 고향에 내려갔다. 사림의 당파가 지역을 기반으로 한 배경이 여기에서 나온다. 조선 초기 70년 동안 권력에서 밀려나 야당 생활을 하던 사림파는 지방조직을 배경으로 9대 성종 때부터 중앙에 진출하기 시작, 14대 선조 때 권력을 장악했다. 지금 정치권에 훈구(勳舊)와 사림(士林)의 논쟁이 한창이다. 이정우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 청와대 브리핑에 낸 기고에서 “참여정부를 아마추어 운운하는 사람도 조선시대 몇 차례 역사에 등장했던 사림파가 번번이 좌절하고 훈구파가 득세하는 것을 보고는 역사의 후퇴를 개탄했을 것”이라며 현 정부의 개혁정책을 조선조 사림파에 비유했다. 그는 사림파의 선명한 개혁성을 강조하며 여론의 비판을 받고 있는 대통령 자문위원회를 방어했다. 이 위원장이 사림을 거론한 것은 등장 당시의 역사적 당위성을 강조한 것이리라. 사림이 연산군 이후 3대에 걸쳐 네번의 정치탄압(사화)을 당했지만 불씨를 살려 정권을 장악한 것은 당시 시대정신에 일치했기 때문이다. 사림은 이방원, 수양대군의 쿠데타 세력에 붙어 공신이 됐던 훈구세력의 부패와 가렴주구를 대체할 세력으로 시대적 지지를 얻었던 것이다. 사림파가 훈구파를 몰아낼 때는 단결했지만 일단 권력을 장악하자 곧바로 분파를 형성했다. 사림파는 동인과 서인으로 갈라지고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눠져 조선조 후반기 300년은 이른바 사색당파(四色黨派)의 역사였다. 조선의 당쟁은 지역을 기반으로 했다. 서인은 기호지방, 동인과 그 갈래인 남인은 영남 유생을 기반으로 했다. 유교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내걸고 그들은 결국 지역주의 패싸움을 했던 것이다. 집권 초기 사림파는 부패하지 않았지만 무능과 당파싸움으로 일관했다. 정권을 쥔 정당은 상대 당파의 씨를 말리기 위해 수차례 사화를 일으켰다. 선비들은 백성이 굶든 말든 상관없이 권력에 아부하며 뇌물을 돌려 출셋길을 찾는 데 혈안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두 차례 외침을 당한 것도 권력을 좇는 당파싸움의 결과였고 19세기에는 국제사회 변화를 읽지 못하다가 국권을 빼앗겨야 했다. 이 위원장의 사림론에 공감하지 못하는 대목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사림 등장 초기의 시대정신으로 참여정부 정책을 옹호하려 했겠지만 사림이 장기 집권하면서 부패와 무능, 외척 발호로 조선조가 급속히 붕괴됐던 점은 간과한 것 같다. 역사의 도도한 물줄기를 타는 행위는 정당성을 갖지만 그 흐름에 거스르는 것은 심판이 따른다. 그 흐름은 바로 시대정신일 것이다. 참여정부의 핵심들은 출범 초기 훈구파를 누른 사림파의 시대정신에 공감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사림의 역사적 오류 또는 역류를 되짚어봐야 한다. 그러면 지금의 시대정신은 무엇일까. 국가 경쟁력을 높이고, 동북아시아에 복잡하게 얽힌 이해관계에서 민족의 생존권을 찾는 길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작금의 경기불황이야 사이클을 타면 다시 회복한다. 문제는 참여정부의 경제정책이 먹혀들지 않고 한국경제의 국제경쟁력이 상실되고 있다는 점이다. 또 한세기 전에 동북아에 전개됐던 헤게모니 전쟁을 부패하고 무능한 사림파의 소견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천체의 우주 쇼에 비견되는 동북아 각축전이 한세기 만에 다시 돌아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민초의 걱정은 사대부 계급이 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눈 돌릴 여유가 없이 당파싸움에 매몰돼 있던 과거가 한세기 만에 다시 돌아오고 있질 않느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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