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舊정권 비자금” 대학교수도 ‘깜빡’

지방대 영문과 교수인 P(52)씨는 7월말 서울 시내 찻집에서 우연히 위조수표 브로커로부터 “수천억원대 비자금을 수표로 보관중인데 현금으로 바꿔주면 사례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브로커들은 “한국군이 베트남전 때 현지 중앙은행에서 발견한 금괴, 구 정권 실세와 재벌들이 은닉하고 있던 비자금이 전국 10여개 창고에 보관돼 있다”며 휴면 화폐 40경, 외화 4조4,000여달러, 금괴 1만5,100톤, 양도성예금증서(CD) 1경3,942조 등 비자금 규모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화폐나 수표의 고유번호까지 제시했다. 비자금의 터무니없는 규모를 반신반의하던 P씨는 거액의 사례비를 받으면, 월셋방 생활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생각, 결국 지난 달 10일 브로커를 만났다. P씨는 이때 전달 받은 500억짜리 수표 1매, 450억원짜리 1매, 100억짜리 수표 7매 등을 총 2,150만원에 평소 알고 지내던 A(39)씨에게 되팔았다. “수표를 팔아 액면가의 5%만 내게 넘기고 나머지는 가져도 좋다”고 신신당부했지만, 이미 A씨는 경찰 수사망에 걸려 든 뒤였다. 경찰청은 26일 수천억원대의 자기 앞 수표를 위조해 유통하려 한 P씨 등 7명을 위조유가증권 행사 혐의로 구속하고, 위조 및 공급총책 이모(42)씨 등 2명을 수배했다. 조사 결과 브로커들은 수표를 사는 사람에게 “비자금에 대한 모든 정보, 비밀 등 일체의 내용을 외부에 공개하지 않을 것이며, 이를 위반할 때는 법적인 처벌을 감수하겠다”는 내용의 보안각서까지 받아와 위조 수표가 10여 단계에 걸쳐 재판매됐던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수억원대에 달하는 수수료의 유혹 때문에 금융권에 위조 수표의 진위 여부를 확인하는 경우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면서 “대학교수까지 비자금 존재를 광신도처럼 믿고 있었다”며 혀를 찼다. <정원수 기자 noblela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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