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제의 책] 정영문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나는 수레 위에 실린 것처럼, 수평으로 누운 채로 어두운 황야 위를, 시간의 허공을, 혼자 빙판 위를 미끌어지듯 떠돌고 있었다. 영원의 넓이를 느끼며, 무한이 강요하는 평온 속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 정처없는 방황에… 나의 생이 자리하고 있었음을, 그리고 그것은 이미 죽은 내게는 쓸데없는 깨달음이라는 것을.』(본문 중에서)정영문의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은 근대성이 몰락한 폐허위에 자리잡은 현대인의 소외의식, 극단적인 외로움과 존재의 불안을 보여주는 45편의 짧은 소설을 담고 있다. 그는 전통적인 소설 구조를 파괴하면서 패러디와 알레고리적인 이야기 전개를 통해 근대인의 일그러진 영혼을 드러내보인다. 그의 소설은 「곱사등이」 「낙타가 등장하는 꿈」 「자신을 저격하다」 「미친 코끼리」 「살인에 대한 상상」 「카프카와의 대화」 등 제목들이 암시하듯 허무주의적이고 종말론적인 색채로 가득차 있다. 슬픔을 운명처럼 지니고 있는 난쟁이나 꼽추, 혹은 인간의 불안한 의식을 암시하는 악몽이 글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짧은 이야기의 병렬, 비유적인 이미지나 상황 설정 등 작가의 개성적인 글쓰기는 독자에게 인내를 요구한다. 그러나 근대적인 역사관, 혹은 「가족·가정·집」으로 상징되는 전통적 윤리관을 거부하는 그의 소설은 역설적으로 신에 의지해 구원을 찾으려는 「나」의 애타는 자기 확인에 다름 아니다. 그는 현실 저 너머에 자리잡은, 즉 신화로의 외로운 여행을 통해 인간의 영혼을 왜곡시키는 부조리한 현실세계를 고발한다. 죽음의 이미지, 허무주의가 짙게 깔려있는 이 소설의 행간에서 진정성과 구원의 실체를 찾으려는 작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이 소설을 읽는 시간은 행복한 시간이 될 듯하다.【문학과지성사·6,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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