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륜과 살인. 인간이 저지르는 행동 중 이보다 더 비윤리적인 게 있을까. 육체적 욕망과 본능에 휩싸인 존재는 영혼이 없는 인간, 한마디로 동물이 아닐 수 없다. 이들의 본성 깊은 곳에는 도덕과 양심 대신 피와 살이 뒤엉킨 욕정만이 이글거리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자연주의 대문호 에밀 졸라는 불과 28살의 나이에 인간 본성의 한 측면을 참혹할 만큼 숨김 없이 드러냈다. 인류의 이성과 합리성을 부르짖던 19세기 후반에 졸라의 작품 ‘테레즈 라캥’은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쏟아진 비난은 작가 혼자서 감내하기엔 쉽지 않았을 터. 오늘날이야 자연주의 문학의 효시로 인정 받고 있지만 당시 언론과 평단은 “에밀 졸라는 마치 포르노그라피를 펼쳐 놓고 스스로 만족해 하는 불쌍한 히스테리 환자”라며 연일 혹평을 쏟아냈다. 비판의 수위가 얼마나 거셌는지 저자 스스로 2판 서문에 열한 페이지에 걸쳐 자신을 옹호하는 반박문을 실었을 정도. 졸라는 “나는 해부학자가 시체에 대해 행하는 것과 같은 분석적인 작업을 살아 있는 두 육체에 대해 행한 것 뿐”이라고 맞섰다. “나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를 원했다. 나는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육체의 필연에 의해 자신의 행위를 이끌어가는,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 받는 인물들을 선택했다. 테레즈 라캥의 두 주인공인 테레즈와 로랑은 인간이란 동물이다.” 평단의 비판에 냉정함을 잃지 않고 인간의 본성을 지적한 대목에선 작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이 작품은 박찬욱 감독의 신작 ‘박쥐’의 모티브가 됐을 정도로 줄거리와 상황 묘사가 파격적이다. 줄거리를 들여다보자. 어렸을 때 고모인 라캥 부인에게 맡겨진 테레즈는 여자 아이지만 건장한 체질과 야성적인 성격의 소유자다. 라캥 부인은 병약한 아들 카미유를 위해 테레즈와 결혼 시키고 파리 퐁네프 파사주로 이주해 잡화상을 연다. 이들은 원만하고 안정된 생활을 하지만 어느날 카미유가 데려온 로랑의 존재로 모든 게 어긋나기 시작한다. 육체적 욕망에 목말라 하던 테레즈는 건장한 체격의 로랑과 불륜을 저지르고 급기야 뱃놀이 중 남편 카미유를 센 강에 빠뜨려 살해한다. 카미유가 죽은 뒤 테레즈와 로랑은 결혼하지만 이들 앞에 카미유의 환영이 밤마다 나타나 결국 서로의 관계도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비극적 결말 못지 않게 인간 본성에 대한 작가의 섬세한 통찰이 깊은 인상을 남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