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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경제소사/6월10일] 박동명 사건
권홍우 편집위원
1975년 초여름, 연예계에 한파가 몰아쳤다. ‘박동명 리스트’ 때문이다. 발단은 1975년 6월10일, 대검 특수부의 박동명(당시 31세) 구속 발표. 26만 5,000달러와 원자재를 해외로 밀반출한 혐의였다. 연간 수출이 50억달러를 갓 넘던 시절, 금액 자체도 적지않았지만 보다 놀라운 사실이 숨어 있었다. 여성편력.
신앙촌 박태선 장로의 장남으로 여배우와 동침하던 중 수사관들에게 구속된 그의 맨션에서는 외제 가구와 핸드백ㆍ목걸이 등 수많은 사치품이 나왔다. 세인들의 최대 관심사는 100여명의 명단. 여성주간지 표지 모델을 주로 공략했던 그의 리스트에는 유명 연예인 26명도 포함돼 있었다. 일본의 환락가를 전전하고 플레이보이클럽을 드나들며 바니걸들에게 수천달러씩의 화대를 뿌렸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소문 속에서 영화인협회는 여배우 13명을 제명했다.
박동명 사건의 전말은 검찰에 의해 자세하게 전해졌다. 유신헌법에 대한 비판마저 금지한 긴급조치 9호의 공포 분위기 아래 검찰은 ‘사회 부조리 일소’ 차원에서 모든 혐의를 그대로 흘렸다. 과연 사회기강은 제대로 섰을까. 찬바람이 불 무렵, 불만으로 가득찬 26세 청년이 돈 2만6,000원과 손목시계, 가짜 금반지를 빼앗으며 두 달 동안 3개월 된 갓난아이부터 70세 노인까지 17명을 살해한 김대두 사건이 일어났다. 최고권력자가 정보기관을 동원해 여배우들과 환락의 밤을 보내는 이면에서는 이런 일들이 벌어졌다.
박동명 사건 34년이 지난 오늘날은 과거와 다를까. 도덕성에 흠결이 있어도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라는 생각이 세상을 지배한다. 그래서 경제가 좋아졌나. 명저 ‘불확실성의 시대’를 남긴 경제학자 갤브레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경제란 도덕이라는 바다 위에 떠 있는 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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