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 3심제와 상고법원


18세기 말 유럽에서는 법원의 최종 판결이 나오기까지 100년이 걸리기도 했다. 소송 당사자가 죽은 뒤에야 판결이 내려지는 경우는 허다했다.

그러다 보니 법조인은 과중한 업무에 묻혀 살았다고 한다. 당시 대문호이자 변호사였던 괴테는 자서전에서 "산더미 같은 재판기록이 날마다 쌓여 2만여건에 이른다. 하지만 1년 동안 처리할 수 있는 것은 겨우 60여건에 불과하다"고 탄식할 정도였다.

스마트폰으로 2시간짜리 영화 1편을 40초 안에 내려받을 수 있는 요즘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다.

우리나라 대법관들이 1년에 처리해야 할 상고 건수는 3만6,000건을 웃돈다. 100년이 아니라 10년 재판도 용인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할 때 대법관 13명(14명 중 법원행정처장 제외)이 맡아야 할 소송은 가히 살인적이다. 1명이 한 해 2,000건을 맡다 보니 대법관들은 야근은 물론 주말도 반납하고 서류에 파묻혀 산다.

'신의 심판에도 오판은 있다'는 북유럽 격언을 곱씹어보지 않더라도 예기치 못한 소홀함과 착오를 미뤄 짐작해볼 수 있다.

법조계 안팎의 지적과 우려가 높아지자 결국 대법원이 '상고법원' 카드를 내밀었다. 대법원 아래에 상고사건을 담당하는 별도의 상고심 법원을 두기로 한 것이다.

대법원은 최고법원으로서 법령 해석과 법 적용의 통일이라는 법률심 본연을 기능을 담당하겠다는 취지다. 대신 법리가 올바르게 적용됐는지를 살펴 개별사건의 권리구제 기능은 상고법원에 맡기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대법관은 법령 해석의 통일에 관련된 주요 사건이나 공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사건에 충분한 시간을 갖고 심리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상고법원'에 대한 반대 여론도 없지는 않다. 일각에서는 상고법원을 두고 고등법원 부장급 판사가 재판하는 방안은 위헌(違憲) 소지가 높다고 주장한다. 또 일부 법조인은 대법관 수를 늘리든지, 대법원 안에 상고심을 전담할 부장급 판사를 두자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한다. 미국이나 영국·독일·일본처럼 상고제한제도를 둬 대법원의 사건 수를 줄이자는 의견도 있다.

물론 각각의 주장과 의견에는 일리가 있다. 이 때문에 상고허가제(1981년)와 대법원에 일반법관 배치(1959년), 고등법원에 상고부 설치(1961년) 등은 과거에 시행됐다가 몇 년 지나지 않아 폐지되기도 했다.

대법원은 이러한 여론과 사법 역사, 국민 정서를 살펴 상고를 인위적으로 제한하지 않고 '3심제' 취지를 살릴 수 있는 상고법원을 최종안으로 내놓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해결해야 할 과제는 남아 있다. 대법원과 상고법원이 사건을 어떻게 나눠 맡을 것인지는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만큼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이에 앞서 법원은 하급심 강화에 대한 노력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소송 당사자들이 하급심에서 만족스러운 재판을 받았다는 확신을 심어주면 상고심은 법률심으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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