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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천 개 신탁·보험회사 근거지로 둔갑
글로벌 금융위기 초래한 근본원인 지목
법망 피해가는 악의적 집단 규제 시급
올해 초 뉴스타파가 ICIJ(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와의 공동 조사를 통해 조세회피처(Tax Haven) 이용 명단을 공개해 엄청난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당시 공개된 명단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만한 인사들이 다수 포함됐고 국세청의 후속 조사 결과 2007년부터 2013년 9월까지 조세회피처 50군데로 송금된 금액이 무려 998조원에 육박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최근 발표된 자료에 따르면, 지난 9월 말 현재 조세회피처에 소재하고 있는 개인, 펀드, 금융기관, 일반 법인이 보유하고 있는 국내 주식 액수는 총 55조 1,427억원인 것으로 나타났다. 투자자는 개인 2명, 금융기관 117개, 펀드 1,360개 등 총 1,929개에 이른다. 이는 우리나라 증시 시가총액의 4.3%에 달하는 규모로 투자금과 투자자는 매년 증가하고 있다.
런던시티대 국제정치경제학 교수인 로넌 팰런, 영국 LLP 조세연구소의 CEO 리처드 머피, 프랑스 진보성향의 잡지 '알테르나티브 에코노미크'의 부편집장인 크리스티앙 샤바뇌가 그 동안 은밀히 가려져 있던 조세회피처의 현황과 문제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신간 '택스 헤이븐'을 펴냈다.
저자들은 조세회피처가 글로벌 금융위기를 초래한 중요 요인 중 하나라며, 조세회피처에 대한 적절한 규제가 향후 금융 시장을 안정시키기 위한 국제 사회의 노력에 핵심이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일례로 지난 2008년 파산하면서 전세계적인 금융공황을 몰고 온 리먼브러더스는 미국 델라웨어에 등록돼 있었는데, 이 곳은 19세기 후반부터 미국 내부의 조세회피처 노릇을 하던 곳이다. 리먼의 파산 직후 매도프 스캔들까지 발생했는데, 월가의 유명한 금융자산가였던 버나드 매도프가 꾸민 500억 달러 규모의 피라미드형 사기 행각이었다. 매도프의 사기 행각과 조세회피처 간에 긴밀한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이 발견됐고, 2008년 12월 '뉴욕타임즈'는 "매도프에 대한 스포트라이트가 역외펀드로 옮겨갔다"는 기사로 조세회피처의 문제점을 심층 보도한 바 있다.
조세회피처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꼭 내야 하는 '세금'을 피할 수 있다는 이유로 돈과 권력을 가진 이들이 악용한다는 데 머물렀다. 저자들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조세회피처가 금융의 세계, 즉 국가와 기관, 그리고 개인의 금융자산을 관리하는 산업군, 그것도 악의적인 산업군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며 경계심을 늦추지 않는다.
저자의 분석에 따르면 2009년 기준 전세계적으로 케이맨 제도, 버뮤다 제도, 버진 아일랜드 등 46~60곳의 조세회피처가 활동하고 있다. 그들은 약 200만개 정도의 국제비즈니스회사와 수천 개의 신탁, 뮤추얼펀드, 헤지펀드, 전속보험회사의 근거지가 되고 있다. 그런데 조세회피처를 이용하는 사람들은 한 곳에만 머물지 않기 때문에 해당 지역의 규제 유무가 그들에게 영향을 거의 끼치지 않는다. 만약 어떤 문제가 생기면 다른 곳으로 옮겨버리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현재 국제 사회에서 힘을 쏟고 있는 조세회피처에 대한 규제 강화는 결국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게 저자의 전망이다. 해당 지역의 규제 시스템이 아무리 견고하다 할지라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떠나버리면) 실제로 준수하는 정도가 낮을 수 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조세회피처가 활용되는 역외 세계를 효과적으로 규제하기 위해서는 해당 지역뿐만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활동 역시 규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들이 그 장소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가능하게 하면서 법망을 교묘하게 피해가는지를 규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은 "조세회피처를 이용하고 있는 전문가 집단의 행동은 전적으로 세계 경제와 국가 시스템에 기생하는 기생충과도 같다"면서 "(국제 사회에서) 규제하려는 움직임에 이들이 강력히 저항하겠지만 (금융 시장의 바람직한 발전을 위해선)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전투"라고 잘라 말한다. 1만 9,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