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8월 10일] 미국의 대북외교를 보며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으로 한반도 정세가 꿈틀거리고 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여기자 석방을 위한 개인 방북으로 의미를 제한하려는 모습이고 북한은 북미 현안 전반에 대한 협상의 시작으로 의미를 키우려는 듯하다. 미국과 북한 모두 나름의 실리와 명분을 챙겼으니 손해가 아니라는 점에서 이번 일이 성사될 수 있었다. 클린턴 방북이 본격적인 북미 협상의 신호탄이 될 것인지, 아니면 여기자 석방이라는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것인지는 아직 불확실하다. 그러나 낙관론과 신중론이 교차함에도 불구하고 클린턴 방북이 대결과 제재 국면의 북미관계를 대화와 협상 국면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했음은 부인하기 힘들다. 악재를 북미관계 반전카드로 우선 클린턴 전 대통령의 방북 자격과 관련해서는 미국이 주장하는 대로 공식 특사나 현직 관료가 아니지만 현직 국무장관의 남편이자 전직 민주당 대통령이라는 점에서 북미 간 허심탄회한 의견을 교환할 수 있는 '사실상의' 특사임은 분명해 보인다. 동행 인물 중 오바마 당선자 정권 인수팀장이자 현 행정부 씽크탱크 책임자가 포함됐음은 김정일의 이야기가 오바마 행정부에 직보될 수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짧은 일정에서 진행된 70분의 김정일ㆍ클린턴 면담은 단순히 외교적 수사나 의례적 인사만을 주고받을 시간이 아니다. 북미 간 현안과 관심사에 대해 충분한 토론과 제안이 가능한 시간과 분위기였다. 따라서 이번 클린턴 방북은 여기자 2명의 석방을 넘어 북미관계의 전환을 위한 심도 있는 토론이 교환됐고 그 내용이 오바마 대통령에게 전달됨으로써 김정일 위원장과 오바마 대통령 사이의 '간접' 대화가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최근 들어 북미 간에는 제재 일변도의 대결 구도에서 대화를 모색하는 분위기가 감지되고 있었다. 미국은 이른바 '포괄적 패키지' 전략을 언급하면서 북한과의 실질적인 협상을 모색하고 있었고 북한도 양자협상을 거론하며 이에 화답했다. 따라서 클린턴과 김정일의 대화는 상당 부분 북미협상 재개를 위한 양측의 입장과 요구사항이 논의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클린턴이 포괄적 패키지의 내용을 설명하고 김정일이 그에 대한 관심과 우려를 표명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협상재개 조건과 방식에 대한 의견을 교환했음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기대 섞인 전망을 하자면 김정일 위원장이 상황을 더 악화시키지 않고 여전히 비핵화 의지가 있음을 재확인해주고 이에 대한 화답으로 클린턴 전 대통령이 북미 양자협상을 거쳐 6자회담을 재개하는 방식의 가능성을 언급했다면 향후 북미관계는 극적인 협상 국면으로 전환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여기자 억류라는 난감한 상황을 오히려 북미관계 전환의 반전 카드로 활용하는 미국의 멋진 외교를 보면서 비슷한 상황에 놓여 있는 우리 정부가 난감함을 느끼는 것은 당연하다. 개성공단의 유씨가 억류돼 있음에도 그를 무사히 데려오기는커녕 그의 신변과 안전마저 확인하지 못하는 참담한 현실은 북한의 통미봉남 탓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이명박 정부의 비현실적인 대북 접근에 기인한다. 제재 일변도 대북접근 탈피를 오바마 행정부는 북한과 대결국면을 유지하면서도 여기자 문제를 별도의 인도적 문제로 분리 접근했고 꾸준히 물밑 접촉을 지속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유씨 문제를 오히려 대북 압박의 명분으로 활용하면서 유씨 석방을 남북관계 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걸어버렸다. 제재 일변도의 강경 입장이 북을 굴복시킬 것이라는 '원칙 과잉'으로는 자국민의 안전을 담보하지 못하며 향후 전개될 북미관계 변화와 한반도 정세 전환 국면에서 수세적인 방관자 신세를 면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명박 정부는 클린턴 방북을 보면서 떨떠름해 할 게 아니라 뒤늦은 변화를 모색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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