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나라나 지켜야 할 역사와 전통이 있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가 지난 세밑 기습적인 신사참배를 하고 나오면서 참배의 명분으로 내세운 말이다. 총리 당선 이후 매년 신사참배를 해왔던 그였기에 이번 참배 행위는 사실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니다. 어이가 없는 것은 그의 역사관이다.
우리에게 역사 혹은 전통이 의미를 갖는 것은 어떤 차원에서인가.
역사 혹은 전통이 그 자체로 인정받던 시절이 있었다. 기독교의 전통에 대해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던 중세시대가 그랬고, 고대 그리스의 전통에 대한 르네상스 시절의 흠모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런 소박한 신념은 계몽주의 시대를 거치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인간의 사유능력에 대한 자신감이 충만하던 시절, 역사와 전통은 단지 우리의 인식을 왜곡시키는 선입견의 원천일 뿐이었다. 우리는 아무런 전제 없이, 즉 역사와 전통에 사로잡힘 없이 우리의 이성만을 사용할 때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다. 계몽주의가 볼 때 역사와 전통을 그 자체로 인정한다는 것은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요 이성 사용의 포기이고, 인간임을 망각한 행위다. 그래서 계몽주의가 볼 때 중세는 암흑시대다.
물론 계몽주의의 역사관도 지나치게 소박하고 무모한 것으로 드러난 지 오래다. 우리가 역사와 전통을 벗어난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바람직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있는 그대로의 역사와 전통의 의미가 다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 혹은 전통과 우리의 이성을 조화시키는 노력이 중요하다. 전통의 권위를 무조건 따르는 것이 아니라, 사유를 통한 적극적인 비판에 의해 역사의 참뜻은 드러난다. 그래서 권위는 그냥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획득돼야 하는 것이다.
전범을 받드는 전통도 하나의 전통이기에 그 자체로 존중돼야 한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발언은 권위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이고, 이성 사용의 포기이며, 역사의 참뜻에 대한 왜곡이다.
<국제부 최윤석 기자 yoep@sed.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