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년 전과 닮았다. 우승을 위해 양말을 벗거나 연장전을 치를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현재의 에이스도 과거의 에이스처럼 위기를 평정심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전했다.
최나연(25∙SK텔레콤)이 14년 전 박세리(35∙KDB산은금융그룹)가 정상에 섰던 '신화'의 땅에서 감동을 재연했다.
최나연은 9일(한국시간) 미국 위스콘신주 콜러의 블랙울프런 골프장(파72∙6,954야드)에서 끝난 제67회 US 여자오픈 챔피언십 4라운드에서 경기 중반 아찔한 실수로 트리플보기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무너지지 않고 만회했다. 1오버파 73타(최종합계 7언더파 281타)를 적어낸 최나연은 양희영(23∙KB금융그룹)을 4타 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최나연은 10세 전후 나이에 박세리를 보며 꿈을 키운 '세리 키즈' 세대 가운데 최근 수년간 대표 주자로 꼽혀 왔다. '옥의 티'였던 메이저 대회 무관 꼬리표도 시원하게 떼어냈다. 그것도 지난 1998년 박세리가 맨발 샷 투혼을 발휘했던 바로 그 무대에서 생애 첫 메이저 타이틀을 따내 감격이 더 컸다. 최나연은 지난해 10월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투어 사임다비 대회에서 한국(계) 선수의 통산 100번째 우승 매듭을 지은 주인공이기도 하다.
지난해 유소연(21∙한화)에 이어 역대 US 여자오픈에서 여섯 번째 한국인 챔피언에 오른 최나연은 58만5,000달러(약 6억6,500만원)의 상금을 받았다. 한국(계) 선수의 4대 메이저 대회 통산 14번째, LPGA 투어 통산 103번째 우승이다.
아마추어 국가대표 출신 최나연은 국내에서 3승을 거두고 2008년 미국 무대에 데뷔했다. 기대에 비해 우승 소식이 늦어 애를 태웠다. 마지막 라운드에서 한 방이 부족해 '새가슴' 소리를 들어야 했다. 심리상담까지 받으며 애쓴 끝에 2009년 9월 삼성 월드챔피언십에서 LPGA 투어 55개 대회 출전 만에 첫 승의 벽을 넘어선 뒤 정상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이날 최나연은 양희영에 6타 앞선 단독 선두로 4라운드를 시작했다. 전반을 마쳤을 때 5타 차 리드를 지켜 우승까지 순항하는 듯했으나 10번홀(파5)에서 큰 위기를 맞았다. 왼쪽 숲 속 해저드 구역으로 날린 볼을 찾을 수 없자 티잉그라운드로 돌아가 1벌타를 받고 세 번째 샷을 해야 했다. 순간 샷이 흔들리면서 6타 만에 볼을 그린 위에 올렸고 2m가량의 더블보기 퍼트마저 놓쳐 이 홀에서만 3타를 잃어 버렸다.
순식간에 양희영에 2타 차로 쫓기면서 우승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으로 급변했다. 그러나 LPGA 투어에서 5승을 올리며 '강심장'으로 거듭난 최나연은 추락하지 않았다. 11번홀(파4)에서 곧장 버디를 잡은 것도 좋았지만 결정적인 대목은 12번홀(파4)이었다. 두 번째 샷을 그린 왼쪽 언덕의 잡초 속으로 보낸 그는 볼이 잘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절묘한 샷으로 그린에 올린 뒤 5m가량의 퍼트를 집어넣어 파로 막아냈다.
10번홀에서 트리플보기로 맞은 위기를 12번홀 멋진 파 세이브로 넘긴 것은 1998년 박세리가 맨발 샷으로 연장 승부를 극적으로 이어간 끝에 우승했던 장면을 연상시켰다.
LPGA 통산 25승에 빛나는 '명예의 전당' 멤버 박세리는 이날 1타를 줄여 박인비(24)와 함께 공동 9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대회 우승자 유소연은 공동 14위(5오버파)로 마쳤고 부진에 시달리는 세계랭킹 1위 청야니(23∙대만)는 공동 50위(14오버파)에 그쳤다.